寧越 이야기

주천면(酒泉面)

浮石 2007. 5. 8. 16:09

 

 

 

 

 

 

 

 

 주천지구대 정문 입구에서 보초(?)서는 제비

 

주천리(酒泉里)

고려때 주천현(酒泉縣)이 있었던 곳으로 원주목에 소속되었다가 1905년(고종 42)에 영월군으로 편입되었다. '주천'이라는 지명은 술이 샘솟는다는 주천석(酒泉石)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망산 밑에는 주천이라는 賀叩?잘 보존되어 있다.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청허루(淸虛樓)와 빙허루(憑虛樓)가 마주보고 서 있는데, 조선 순조때의 대학자로 평창 봉평출신인 봉서(蓬西) 신범(辛汎)은 「越行」이라는 영월기행문에서 『청허루』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주천이 생긴 역사는 옛날 어느때 인가

    가리키는 옛터는 좌측 물가인데

    빛바랜 누각은 햇빛 받은 채 고요히 서 있고

    궂은 비바람은 어제현판을 두드리네

그 후 좌변면과 우변면을 통합하여 양변면이라 칭하면서 송하리와 오목리를 병합하였다. 이곳에는 주천면사무소, 주천농고, 지서, 우체국 등 관공서가 많이 있으며, 7개 행정리에 728가구 2,527명(1992년 기준)의 주민들이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절골

군등치(君登峙)를 넘어 거안리 마을 동족으로 예전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 이다.


거안리(居安里)

아세아시멘트 채석광이 있는 월오산(다래산)의 금용광업소 밑에 있는 마을이다. 앞으로는 주천강이 흐르고 토지가 비옥한 곳으로 '거안리'라는 지명은 마을에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청령포로 유배되던 단종 대왕이 이 곳에서 편히 쉬어 간 곳이므로 '거안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 강가에는 부채모양으로 생긴 부채바위가 있고 거안리 뒤쪽인 덕산의 당숲속에는 거안리 서낭당이 있었는데 1970년 새마을운동으로 서낭당은 불태워 없어지고 지금은 당목(堂木)만 남아있다. 아세아시멘트에서 설치한 컨베이어(conveyor)가 거안리 옆으로 지나간다.


군등치(君登峙)

주천과 신천(새내)의 경계가 되는 고갯마루이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길을 오르면 402번 지방도로 마루턱에 '군등치'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다. 그 밑으로는 명옷과 내신평을 끼고 도는 평창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지명의 유래는 단종 대왕이 유배 길에 이 고개를 오르셨으므로 '군등치'라 하였다. 본래의 길은 강 옆으로 길게 이어진 소로길이었다.


덕고개

거안리 마을 뒤에 있는 언덕으로 402번 지방도가 개통되었지만 경사가 심하여 자동차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곳이다. 이 곳은 아세아시멘트의 원료를 채굴하는 채석광이 있는 다래산(月梧山)으로 가는 입구로 아세아시멘트의 컨베이어(conveyor)가 설치되어 있다. 이 고개는 나뭇가지를 여러개 세우고 그 사이에 벼나, 콩, 판 등의 곡식을 쌓아두는 덕모양으로 생겨서 덕고개'라 부른다.


쉼터

덕고개를 넘어 주천쪽으로 곧게 뻗은 402번 지방도 우측인 좌편마을 입구로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될 때 쉬었다 간 곳이므로 '쉼터'라 하였다. 숙부인 세조에 의해서 왕위를 빼앗긴 단종(端宗)은 1457년 6월 22일 돈화문을 나와 화양정(華陽亭, 성동구 화양동)에서 하루를 묵은 후 환관(宦官) 안로(安路)의 전송을 받으며 중추부사 어득해(魚得海)와 군졸 50명의 감시 속에 유배 길에 올랐다.

단종은 광나루에서 이천, 여주까지는 남한강 뱃길을 이용하였고 여주에서 청령포까지는 역로(驛路)를 이용하여 일주일 만인 6월 28일에 도착하였다. 驪州君 大神面 上九里 두둔 부락에는 단종이 물을 마셨다는 '어음정(御飮井)'이 있고, 原州 富論面 丹江里에는 600년이 지난 느티나무와 큰 너래반석이 있는데 이곳 역시 단종이 쉬어 갔다하여 '단정(端亭)'이라 부르고 있다. 그 외에도 영월에는 단종의 유배와 관련된 물미, 어음정, 쉼터, 군등치, 명라곡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다.

단종은 원주 신림역을 지나 황둔-솔치재-신흥역(주천)-배일치재-점동-갈골-옥녀봉-선돌을 지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왔다.


탑거리

주천 뚝방옆에 있는 탑으로 옥개석 받침과 처마곡선의 양식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未漁羊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높이 2.5m의 3층석탑 이다. 이 탑은 하대갑석(夏臺甲石)이 반파되어 없어졌고 중대석(中臺石)은 우주와 당주 1개가 조각되어 있고 1층 탑신은 우주(隅株)만 조각되어 있으나 그 위층은 조각이 없다.


송하리(松下里)·임하동(林下洞)

고사(좌편)와 오목리 사이에 있다. 동네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므로 '송하리→임하동'이라고 하다가 일본식민지 때는 '임하도가'라고 불렀다. 지금 논이 있는 들판에는 큰 소나무를 당목(堂木)으로 모시는 서낭당이 있었으나 일제시대 때 보(洑)와 수로를 만들면서 헐어 버렸다.


오목골(陰谷)

임하동 위쪽에 있는 평야지대로 마을 동쪽에 있는 산의 지형이 오목하게 파인 형상으로 여자들의 음부처럼 생겼으므로 '오목골'이라고 부르고 마을앞의 넓은 들을 '여자들이'라고 했으며, 예안(禮安) 이씨(李氏) 문중의 정자(亭子)가 있었던 곳이다.


태봉산

오목골 북쪽에 있는 동그랗게 생긴 산이다. 조선시대 철종임금의 태(胎)를 이곳에 봉안하려고 했으나, 오목골 마을의 지형이 여성의 음부(陰部)형국으로 음기(陰氣)가 너무 강하여 땅속에서 물이 나오므로 망산(望山)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즉, 철종의 태(胎)를 봉안하려고 했던 곳이므로 '태봉산'이라고 한다.


중도가(中都家)

임하도가와 곳집말(庫舍)사이에 있었다. 예전에는 손씨(孫氏)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集姓村)이었다. '중도가'는 두마을 사이에 있다는 뜻이다. 그 북쪽 서당골에는 옛날 훈장이 글을 가르치는 한문서당이 있었다.


현청터와 빙허루

망산 건너편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엄정주의원의 부친인 엄경렬(嚴敬烈)면장이 살던 집터부근이 '현청(縣廳)터'(우체국 부근)였다. 주천현(酒泉縣)은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 또는 학성(鶴城)으로 신라때 주천현으로 고쳐서 내성군(奈城郡, 영월)의 속현이 되었던 곳이다. 이곳에 주천현의 현청이 있었을 당시는 종 5품의 외직 문관인 현감(縣監)이 이 마을을 다스렸다.

현청 동쪽으로는 빙허루와(憑虛樓), 청허루(淸虛樓)가 마주보며 주천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빛냈다. 지금은 망산 절벽 위에 빙허루가 있는데, 실제로 이곳에는 청허루가 있었다. 「증증동국여지승람」에 『在酒泉縣客官西石壁削立下有澄潭判官趙銘建. 청허루는 주천현의 객관 서쪽에 있다. 석벽이 깎아지른듯한데 그 아래에는 맑은 못이 있으며, 판관 조명(趙銘)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말똥바우

주천리와 신일리 사이인 주천강 가운데에 있는 여러 개의 바위를 말한다. 신일리의 망산(望山)이 갈마음수형국(渴馬飮水形局)의 명당터이므로 그 밑에 있는 검은 바위를 '말똥바우'라고 불렀다.


창말(倉村), 고촌(庫村), 고사

좌편의 402번 지방도 과속방지턱이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籃)」의 원주목(原州牧)편에 보면 이 곳에 '주천창(酒泉倉)'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월과 주천창의 전세(田稅)는 원?흥원창(興原倉)으로 옮겨졌는데 흥원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興原倉 在蟾江 北岸距州南三十里 本州及平昌 寧越 旌善 橫城 等官田稅千此 漕至京師 ---』


주천 제방뚝과 3층 석탑

1914년 10월 일정시대(日政時代)때 주천 들녘을 논으로 만들고 보(洑)와 제방을 쌓기 위해 3층석탑을 본래의 위치에서 약 3m 가량 옮겼다. 이때 금동불상(길이 66m, 폭 20m)이 발굴되었는데 일본인이었던 주천 지서 주임이 보관하다가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 석탑은 수주면 무릉리에 있는 3층석탑과 함께 9산 선문중의 하나인 흥령사지(현, 법흥사)를 찾아가는 신도들을 안내하기 위한 탑이었다고 한다.


신사터

주천 면사무소 뒷산에 있었다. 일제 식민지때 일본 천황의 위패를 안치했던 신사가 있었던 곳으로 일본이 항복을 하자 신사(神社)를 지키던 시개오까라는 일본인이 위패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주천장터

주천 시장터는 조선시대부터 5일장으로 유명한 곳으로 지금도 장터로 이용되고 있다. 그 북쪽에는 1936년 병자년 가력대 큰 산사태가 나서 논밭 전지가 떠내려가고 마을이 황폐화된 '사태골'이 있다.


망산(望山)

주천의 남쪽으로 산봉우리에는 빙허루가 있다. 이곳에 오르면 사방을 바라볼 수 있으므로 '망산'이라고 했으며, 풍수학상 말머리처럼 생긴 갈마음수형국(渴馬陰水形局)의 명당터이다.

이곳은 조선 철종임금의 태(胎)를 묻었던 곳으로 일제시대인 소화(昭和) 5년에 일본인들이 조선에 대한 풍수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전국 명산의 혈(血)을 끊고, 명당자리에 봉안되어 있던 역대 임금들의 태실을 파괴하였다. 이곳의 태(胎)는 이왕직(李王職)을 시켜서 거두어 갔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덮개돌과 금표비가 남아있다. 이 곳이 철종의 태실인 것은 1985년 11월 19일 문화재관리국에서 고증하였다.

태실(胎室)은 왕가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한 치레(일주일)안에 좋은 날을 잡고 태를 씻어 백자항아리에 넣은 후, 큰항아리에 다시담는다. 항아리의 공간에는 영사와 솜을 채운 후 밀랍을 녹여서 바른다. 그 후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밝은 관리를 각처에 보내어 명당터를 잡은후, 태실도감(胎室都監)에서는 안태사(安胎使)를 파견하여 태를 안치한 후 비석(碑石)과중동석(中童石), 석난간(石欄干), 지대석(地臺石)등을 세우고 태실을 만든다고 「태실조영기(胎室造營記)」에 기록되어 있다.

고을 수령들은 태봉 관리를 잘 해야 했으며, 태봉을 잘못 관리한 수령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경남 사천군(泗川郡) 곤명면(昆明面)은 세종(世宗)과 그의 손자인 단종(端宗)의 태실이 만들어짐으로서 곤명현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주천샘(酒泉)

주천교를 지나 신일리 비석거리우측 망산 밑으로 주천면(酒泉面) 땅이름의 유래가 되는 '주천샘'이 있다. 조선 성종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천석(酒泉石), 주천현 남쪽 길가에 있으니 그 형상은 반 깨어진 술통과 같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는 이 돌술통은 예전에는 서천(西川)에 있었는데 그곳에 있을 때는 술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현의 아전이 술을 마시려고 그곳까지 가는 것이 싫어서 현(縣)안으로 옮겨 놓기 위해 여러 사람이 함께 옮기는데 갑자기 우레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술샘이 세 개로 나누어졌는데, 한 개는 못에 잠기고, 한 개는 지금 남아있는 주천샘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 있는지 알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천샘은 1993년에 영월군에서(군수 박완영) 주위의 조경사업을 마치고, 필자가 지은 다음과 같은 『표지석』을 세웠다.

『망산(望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샘물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천(酒泉)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오는곳이다. 옛날에는 이 샘에서 술이 나왔는데 양반(兩班)이 오면 약주(藥酒)가 나오고 천민(賤民)이 오면 탁주(濁酒)가 나왔다고 한다.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의 주천현(酒泉縣)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전설(傳說)에 이하면 조선시대(朝鮮時代)한 천민(賤民)이 양반복장을 하고 와서 약주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약주는 나오지 않고 평소와 같이 탁주가 나오자 화가 나서 샘터를 부순 이후에는 술이 나오지 않고 맑고 찬 샘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447년(세종 2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이조, 공조판서를 지낸 일제(逸濟) 성임(成任, 1421∼1484)은 주천석(酒泉石)의 샘물을 놓고 시(時)를 지었는데

『술이 있어 샘물처럼 흘렀다네, 똑똑 물방울처럼 떨어져 바윗돌 사이로 흘러드는가 하였더니 어느사이에 철철 넘처셔 한 통이 다 찼다네, 술 빚은 것이 누룩의 힘을 의지한 것도 아니고, 그 맛은 자연 그대로라네. 한번 마시면 그 기분이 맑은 하늘 위에 노니는 것 같고, 두 번 마시면 꿈속에서 봉래산(蓬萊山)의 빈터에 이르게 되니라. 줄줄 흘러 써도 써도 마르지 않으니, 다만 마시고 취하는데로 만족할 뿐 어찌 값을 말하였으랴. 당시에 고을 이름 붙인것도 다 듯이 있었으리 마침내 산 속의 귀신들이 우레와 폭풍우로 한 밤중에 술샘을 옮겨 버렸네. 옥검(玉檢)을 위하여 깊은 동학(洞壑)에 폐쇄한 것이 아니면, 반드시 금단지에 저축하여 깊고 깊은 연못에 감추었으리라. 감감하고 비어서 나민 자취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오직 끊어진 돌 조각만 길가에 가로놓였네. 내 하늘을 되돌려 옛날 샘의 맥(脈)을 돌려놓고자 하거니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군침 흘리지 말게 하라. 내가 원하는 것은 천도복숭아를 안주삼아 밝은신 임금께 바치고, 한잔을 올리면 천년의 수(壽)를 하려니, 일만 잔 올린다면 다시 만만세(萬萬歲)를 기약하리니 길이 법궁(法宮)에 납시어 신선과 만나소서.』라고 노래하였다.


다래기

도천리 건너편으로 산골짜기 밑에 작은 산전밭이 많이 있으므로 '달(산전)+떼기(작은땅)'라 불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달떼기→다래기'로 변하였다. 마을 앞에는 도천리(桃천川里)로 건너다니던 뱃터거리가 있었으나 지금은 다리가 설치되어 나루터기는 없어졌다.


구누터(軍號基)

주천 면사무소를 지나 수주면과 아침치, 판운리로 갈라지는 삼거리의 서쪽 언덕이다. 예전에 주천이 현이었을 당시 순라(巡邏)를 돌던 기찰 포교들이 군령전달을 위해 미리 약속해 두었던 군호(구누)나 암호를 신홀 전달하던 곳이므로 '군호터→구누터'라 불렀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수주면 중방동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아침치

주천 북동쪽 판운리(板雲里)의 유목정(楢木亭)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는 행정구역상 주천 4리에 속하며 열 대여섯 가구가 살고 있다. 이곳은 수주, 주천에서 유목정을 지나 판운리와 평창으로 가는 길목으로 예전에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원래 지명은 '아차치'였으나, '아참치→아침치'로 변했다고 한다. 아침치에서 판운리의 유목정으로 넘어가는 험악한 고갯길을 '아침치'라 했는데, 지금은 도로포장이 다 되어 있어서 판운, 대상리를 지나 평창으로 갈 수 있다.


분추골(분토골)

양지말 위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이곳은 시멘트가 없었던 시절에 벽이나 부엌의 부뚜막을 바를 때 쓰는 입자가 고운 흙인 분토가 많았던 곳이므로 '분토골(粉土谷)'이라고 불렀으나, 그 후에 '분추골'로 음이 변하였다.


아침서낭당

아침치 고개 마루턱에 있다. 커다란 마차나무와 느릅나무가 신목으로 서있고 서낭당에는 『城皇神位』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정월 초사흘에 당고사를 지내는데 제주(祭主)와 유사(有司)는 생기(生氣)와 복덕(福德)을 맞추어서 뽑힌 사람이 고사를 주관한다. 유사는 대문에다 왼새끼를 꼬아 한지를 끼운 금줄을 치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고, 부부끼리도 서로 다른 방을 쓰며 부정한 것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젯상에는 삼색 과일인 밤, 대추, 곶감과 포, 메, 탕을 진설하며,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 소지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각 가정의 복을 축원한다. 제단이 되는 서낭당은 며칠 전부터 청소를 한 후 금줄을 매고 붉은 진흙을 뿌려서 잡귀의 근접을 막기도 한다. 아침치서낭당에서 덕우와 광탄(廣灘)을 지나면 서면 광전리(廣錢里) 돈골(錢谷)로 갈 수 있다.

이곳 돈골에는 송부자라?구두쇠가 살았는데 그는 자기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막기 위해서 『주천쪽에서 오는 손님은 아침치서낭당이 막아주고, 판운쪽 손님은 장취(장충)서낭님이, 배일치쪽 손님은 마지라오서낭님이, 그리고 사정리쪽 손님은 당마루서낭님께서 막아달라』고 빌었는데 결국은 여름철 큰 장마로 집과 농토가 떠내려가 망해 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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