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越 이야기

충절사(忠節祠)

浮石 2014. 10. 28. 07:00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후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엄 흥도, 추 익한, 정 사종 충신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영월군민의 오랜 숙원에 의해 1997년에 건립되었으며, 매년 단종문화제 기간에 제를 올리고 있다.

 

엄흥도

 

엄흥도는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 기슭에 암장한 충의지사이다.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관가에서 동강에 단종의 시신을 버리며 '왕명으로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엄흥도는 아들 3형제와 같이 남몰래 시신을 거둔뒤 뿔뿔이 흩어졌다.
1726년 영조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여각을 세웠으며 , 1758년에 창절사에 봉안했다. 1833년 순조 때는 공조판서 (정2품)로 승직했고, 1877년 고종은 충의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사종

 

정사종은 봉선대부 전의감 부정 정극실(丁克實)의 아들이다.
정사종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단종을 모시기 위해 영월로 내려와정거실(丁居實)이라 이름을 고치고 운둔생활을 하였다.

군위현감이던 정사종은 1455년(세조 원년)에 참판 박팽년(朴澎年)과 더불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복위모의가 발각되어 박팽년이 해를 입자 벼슬을 버리고 영월에 와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단종이 마침내 승하하니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죽으려 하자. 그 아들이 울면서 “임금을 위하여 진충(盡忠)하심은 당연한 길이오나 반드시 임금을 감장(勘葬)할 사람이 없을것이니 단종을 염장한 후에 세상을 떠나시더라도 기회는 있을 것이옵니다”라고하였다. 이때 그는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네 말이 옳다”라고 대답하면서 결심을 변경하였는데,
이때 세조는 “단종의 시체를 감장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라고 명을 내렸기로 황망한 가운데 엄흥도와 더불어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낸후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여귀전생 이 자손 위초목 불구공명(余歸田生 以子孫 爲樵牧 不求功名)’ (너는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후 자손들은 나무나 하고 소 기르며 공명을 구하지 말라)고 유언을 한 뒤에 청령포에 나가 물에 빠져 죽었다. 동학지에는 또 “단종이 승하 하실 때 이조참의 덕식도정(德息覩正) 이종(李種)이 엄호장과 같이 단종을 염습하여 장사 지낸후 밀양으로 같다”고 하였으나, 이조참의 이종이 그때 어떻게 영월에 왔었는지 또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추익환

 

시와 학문에 빼어난 학자로, 유배 생활을 하던 단종을 목숨을 걸고 보필한 충신이다.
오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영월로 낙향한 추익한은 그무렵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 충청감사로 있던 박팽년으로부터 유배중인 노산군을 잘 보필해 달라는 서찰을 받고 과일등의 음식을 봉헌하며 밤낮으로 보살펴 주었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승하하던 날 , 꿈속에서 단종이 백마를 타고 행차하는 모습을 보고 '어디로 행차하시옵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장차 태백산으로 가려 한다'고 말한뒤 사라졌다 한다.
이상하게 여긴 추익한은 단종이 계시는 관풍헌으로 찾아갔지만 벌써 변을 당한 것을 보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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