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성읍민속마을

浮石 2017. 12. 18. 06:00


성읍민속마을은 제주문화의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돌로 돌담을 쌓고, 초가를 짓고, 성을 쌓고, 돌하르방을 만들었던 제주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장인정신과 돌을 이용하는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곳이다.
마을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된 성읍민속마을은 제주도 특유의 풍물과 마을 모습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역사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조선조 읍성의 뼈대를 잘 간직하고 있는 성읍민속마을은 300여 채의 초가와 정의현청이 있었던 일관헌, 정의향교, 정의성 등이 복원돼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95호로 지정된 '제주민요', 도무형문화재 제3호와 11호로 지정된 '오메기술'과 '고소리술', 성문을 지키던 돌하르방, 연자매, 물허벅, 갈옷 등 유무형 자산이 여느 마을보다 풍부한 곳이다.


성읍민속마을은 또 제주민가인 초가의 구조와 올레 구조를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생활박물관이다. 관람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지나친 호객과 점차 원형을 잃어 가는 모습에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성읍민속마을은 제주의 옛 마을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크다.


마을 중심지에 우뚝 서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팽나무는 유서 깊은 마을의 역사를 웅변해주고, 남문 성루에 올라 바라보는 300여 채의 민가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모습을 관람하는 것도 성읍민속마을의 빼놓을 수 없는 광경이다. 매년 10월 이 마을에서는 정의골 민속한마당이 열려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제주시에서 동남쪽으로 34㎞, 표선에서 8.8㎞.


민속촌이 있는 마을로 유명한 성읍리.
그래서 “대장금”과 같은 tv프로그램의 촬영지가 되기도 하였던 마을이다.



정낭 : 주인이 있고 없음을 알린다 대문(大門)이 없는 제주의 민가 (民家)에는 입구 (入口)에 정주석 (定柱石)을 세워 주인이 있고 없음을 알린다. 하나가 걸쳐 있을 때에는 가까운 곳에 있으며, 두개가 걸쳐 있으면 한참 있다가 돌아오며, 세개가 걸쳐 있으면 저녁무렵에야 주인(主人)이 돌아온다는 표시(表示)이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곳으로, 옛 제주사람들의 생활터전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일종의 민속촌인 셈인데, 사람이 현재 거주하고 있다는 점이 일반 민속촌과는 다르다. 마을 주민들이 자진해서 가이드를 해주기 때문에,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마을 중앙에 있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볼 만 하다.


초가 : 제주도의 초가는 제주도 민가의 일반적 형태로서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가정구조 및 그 생활방식을 반영하는 건축물이다. 그 기본구조는 기둥, 귀틀, 보, 보짓, 내도리, 중보, 중마루, 상마루 등 뼈대를 나무로 만든후 주위 벽을 굵은 돌로 쌓아 두르고 띠로 지붕을 덮은 것이다.
벽은 흙을 발라 붙여 돌담을 단단히 하고 지붕은 띠로 덮은 후 직경 5㎝ 가량의 굵은 띠 밧줄로 바둑판처럼 얽어 놓고 있다.
이런 기본구조는 바람 많은 제주에서 견디게 하는 지혜로운 건축기술이었다. 지붕은 1년 또는 2년에 한번씩 덮은 위에 다시 덮어 가므로 상마루의 선이 완만하고 매끈하게 부드러운 선이 나타난다.













일헌관 주변의 느티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 세 그루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읍민속마을은 세종 5년(1423) 정의현청을 이곳으로 옮긴이래 1914년 군현제가 폐지 될 때까지 500여년을 현청 소재지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조 읍성의 기본 뼈대를 잘 보존하고 있으며, 성읍민속마을 한복판에는 이른바 '천년수(千年樹)'로 이름난 느티나무가 중심을 이룬다.
해안에서 8km 쯤 올라간 아늑한 산촌인 성읍민속마을은 정부지정 민속마을로 민속학적 가치가 높고 관광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검은 용암석을 그렁저렁 쌓아올린 듯한 바람막이 돌담. 바람이 직접 안채로 불어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고안해낸 곧은 듯 휘어진 올래. 바람은 섬사람에게 자연을 극복해 내는 슬기와 또하나의 독특한 풍광을 만들어 낸다.





이 가옥은 19세기말에 짓은 한일자형 우진각 지붕 초가로서 안거리(안채)와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거리는 한라산 남쪽 지역에서 흔히 볼수 있었던 전형적인 작은 구들이 있는 3칸 집이다. 정지(부엌) 공간이 비교적 작고, 작은구들은 상방(대청) 쪽에 붙여 만들었는데 비교적 작다. 따라서 육지의 웃방과 같은 예비적 공간의 성격을 띠어 수장공간으로 많이 이용된다. 헛간채는 2칸이며 가장 보편적인 평면의 간살과 구조로 되어있다.
이집으로 인도하는 올래(좁은 골목으로 집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예비 공간으로 주어지는 우영(텃밭), 집뒤의 공간과 여기에 심어지는 각종 나무들은 제주도 주택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 준다.


정의향교와 이웃해 있는 이 가옥은 19세기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 정의 고을의 여인숙으로 쓰였던 일이 있었으므로 주민들 사이에는 지금도 '여관집'으로 통칭되지만, 여관으로서의 특이한 가옥형태는 찾아볼 길 없고 평범한 농가일 따름이다.
3칸 안거리와 자그마한 헛간채가 마주앉은 두이(二)자 집이다. 안거리는 전형적인 3칸 모방집으로서 큰 부엌 공간 뒤로 작은 구들이 배치된 집이다. 정지(부엌) 공간은 비교적 넓으며, 작은 구들 바깥벽 쪽으로는 앞으로 둘 곳을 설정하고 뒤로는 벽장을 설치하였다. 상방(대청마루)을 가운데 두고 구들과고팡이 붙어있다.

자그만 헛간채는 예전 멍석이나 남방아 따위를 두었던 공간이다. 진입은 이문간이나 정낭 시설없이 올래만 설정되며 마당 왼쪽 모로 만들어진다. 헛간채 옆으로 조그만 우영을 마련하고 안거리 뒤로는 알맞은 안뒷공간을 설정하였는데, 이곳으로는 상방에서만 출입하도록 계획되었다. 일종의 정적인 휴식공간이다.











시대가 변하여 문명의 이기는 바람을 타고 제주섬에도 불어 왔다. 그러나 잊혀진 풍경은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곳에 그리고 섬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각인되어 있다.
실제 토박이들이 살고 있는 이곳은 제주 사람의 전통생활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제주 민속놀이와 사투리, 전통 음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그 가치를 한층 더한다. 또한 집집마다 관광객을 맞아 친절한 안내를 해주는 마을 사람들이 있다. 한번 부담없이 안내를 부탁드려도 괜찮을 듯 싶다.





올망졸망 모여 있는 초가사이로 짙은 녹음의 풀내음이 휘감아드는 산간 마을 성읍은 오백년의 긴 세월동안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며 제주섬의 독특한 풍물과 옛 마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해온 향토색 짙은 아름다운 마을이다.


성읍리는 역사상으로 볼때 제주도가 조선초기에서 일제식민지시기에 이르는 동안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나뉘었던 행정구역지 중 정의현의 도읍지였고, 지리상 중산강에 위치하고 있어서 문화유산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곳이다.

얼기설기 엮어진 얕으막한 처마의 초가.

아담하게 자리 잡은 성읍민속마을은 대평원에 곡선미를 뽐내는 오름들이 마을을 빙 둘러가며 솟아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쳤다.


성읍 마을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계기는 1423년 정의현의 읍치를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서 옮겨오게 되면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북쪽의 제주목, 동쪽과 서쪽에 정의현과 대정현을 두었는데, 정의현의 읍치는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의현의 읍치가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관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행정 민원을 보는 데 불편하였다. 이에 따라 도안무사(都安撫司) 정간(鄭幹)이 정의현 지역을 순시하던 중 진사리(晉舍里)[성읍리의 전신 마을]에 이르렀을 때 이 지역이 정의현 고을의 중앙에 위치한 점을 고려하여 새로운 읍치로 최종 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정의현의 범위는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서귀포시 성산읍·표선면·남원읍을 포함하여 과거 서귀포 시내의 동쪽 지역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성읍 마을은 이들 지역의 거의 중앙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의현 고을의 중심지로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완만한 경사지에 너른 평지가 펼쳐져 있어서 한 고을의 읍치가 들어서기에 충분했다고 판단된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성읍 마을 일대는 다른 중산간 지역처럼 용천수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읍리에는 한라산의 중턱에서 발원하여 영주산 서쪽을 경유하고 마을의 동쪽을 돌아나가는 제주도에서 가장 긴 하천인 천미천이 흐르고 있다. 이 하천은 마을 남쪽으로 흘러 신천리 해안 하구로 빠지는데, 경사도가 완만하여 여름철 집중호우 시에는 하천이 범람하여 마을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천미천에는 곳곳에 하천 바닥에 움푹 패인 웅덩이[피트홀]가 있어서 건기에도 물이 고여 있게 되는데, 바로 이 물이 용수로 이용되어 제주도의 다른 중산간 마을에 비해 음료수의 확보가 비교적 용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성읍 마을은 해안에서 인지가 불가능한 내륙 쪽으로 들어와 있다. 아울러 마을 주변으로는 여러 오름들이 둘러싸여 있어서 자연적인 방벽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남쪽이나 동쪽에서 접근하는 외적을 막기에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역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성읍은 일찍부터 전란이 미치지 않는 ‘병화불입지지(兵火不入之地)’로 불리기도 했다.


성읍 마을은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읍성 가운데 전통적인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부분의 조선 시대 읍치 공간은 일제 강점기 이후 시가지의 확장에 따라 원형을 상실했다. 그러나 성읍 마을은 중산간에 위치해 있어서 근대문명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성곽이나 동헌, 객사와 같은 일부 관청 건물들이 복원된 모습을 띠고 있으나 제주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민가들은 잘 남아 있다.

민간의 주거공간이 읍성내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제주 특유의 올레를 거쳐 마당으로 들어서면 독특한 구조를 지닌 초가와 부속 건물, 돗통시·우영·항[취수시설]까지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각 성문에는 제주의 상징 돌하르방이 세워져 있다. 제주목과 대정현에 있던 돌하르방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정의현의 돌하르방만은 아직도 제자리를 지키면서 고을을 진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서문 인근의 향교도 잘 보존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객사에 모셔져 있던 전패가 있다. 전패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중시되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없어졌지만 정의현의 전패만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아울러 민요나 고소리술·오메기술 등의 제조법, 초가 건축술 등의 무형문화재도 전수되고 있다.

이처럼 유형·무형의 문화재가 남아 있는 성읍은 육지부의 하회마을·양동마을·외암리 등의 민속마을과는 차원이 다르다.

육지부의 민속마을이 육지부의 양반문화를 보여주는 전통촌락인 반면, 성읍은 정의현이라는 한 고을의 중심공간이자 성곽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도회(都會)공간이다. 조선 시대 지방행정이 이루어지던 장소임과 동시에 사람과 물자가 모여드는 유통의 중심이기도 하고 관민의 문화가 어우러져 존재하던 거시적 규모의 문화경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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