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용주사(龍珠寺)

浮石 2017. 12. 20. 06:00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다.

용주사는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을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홍살문[홍전문(紅箭門) 또는 홍문(紅門)]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 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 다한 혼정신성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삼문(三門)

절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맞게 됩니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이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한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하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한다.

천보루(天保樓) 경기문화재자료 제36호


대웅보전이 있는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인 '천보루(지방 문화재 제36호)' 여느 사찰의 누각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특히 6개의 커다랗고 높은 초석은 사찰에선 드문 형식으로 궁궐 양식과 유사하며, 대웅전 앞마당에는 왕궁같이 왕이 다니는 길에 박석을 깔아 놓은 것이 이색적이다. 큰 틀에서 사찰이라기보다는 왕실의 여러 행사를 치르기 편리하도록 배치한 구조다. 또한 대웅전과 지장전 등 규모 있게 배치된 각 건물과 정교한 내부 치장, 지극한 정성이 담긴 불상과 불화들은 사찰 예술의 전형으로도 평가된다.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인데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된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民家)의 건물양식 그대로이다.

세존사리탑

삼문과 천보루 사이에는 효행박물관 앞의 5층석탑과 함께 또하나의 5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 5층석탑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으며 기단갑석 위에는 옥신고임으로 처리 되었다 .


옥개석은 처마끝선에서 약간 반전되었고, 옥개받침은 3단씩이다. 전체적인 옥개석의 체감은 비율이 작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부처님의 진시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사리탑은 용주사를 참배하는 모든 불자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용주사의 가람구조에서 가장 중심되는 곳. 흔히 사찰내에서 중심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르는데 정확한 의미에서 보면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곳을 가리킨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부를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하고 줄여서 '대웅'이라 하고 있기 때문히다. 따라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계신 곳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용주사는 '대영웅 석가모니불을 모신 보배로운 전각'이라는 뜻에서 대웅보전이라고 이름하였다.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깊은 건물인데, 보경당(寶鏡堂) 사일(獅馹)스님이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함께 지었다.
또한 정조의 명으로 실학자로서 박학다식하여 문장에 명성을 떨쳤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용주사의 여러 건물에 주련을 썼습니다.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글귀가 바뀌었고 대웅보전에도 창건시의 주련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주련 글귀는 다음과 같으니,

팔만 사천 법문으로 다같이 피안에 이르고,

이백오십대계로 다함께 어두운 길에서 벗어나세.



그후 대웅보전은 1900년 성용해(成龍海) 총섭(總攝)이 중수하고 1931년에 강대련 주지, 1965년에 전관응 주지, 1987년 서정대 주지께서 수리하였다.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大隅石)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고, 대우석은 보통의 경우, 사찰에서는 연꽃무늬·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三太極)·비운(飛雲)·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절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융릉 정자각의 대우석과 동일한 양식인데 융릉과 용주사가 불가분의 인연을 가졌던 만큼 융릉을 이전하는데 참여했던 공장(工匠)들이 절을 짓는데도 관여하였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사원건축양식을 지닌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형식으로 공포(拱包)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多包系)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活柱)를 세웠으며,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올려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외벽의 3면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는 57평으로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위엄과 함께 산뜻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1993년 5월에는 모든 전각의 외부에 단청불사를 하여 가람이 마치 갓지은 건물처럼 산뜻함을 갖추게 되었다.


만수리실은 원래 선당(仙堂 또는 禪堂)이라고 하여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 운붕(雲朋)스님이 도편수를 맡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덕무가 쓴 만수리실의 주련이 당시 있었으니 그 글귀에

도솔궁속에서 큰 게송을 말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반야대위에서 참된 법을 연습하여 무량겁을 초탈하네
兜率宮中稟大偈 普濟衆生 般若臺上演眞詮


라고 하였다. 총면적 86평으로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객실로 사용한다. 천보루의 2층에는 앞뒤로 난간을 둘렀고 익공계 이익공이 섬세하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인데 양끝의 처마가 날렵하게 보인다.




나유타료는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普賢事) 의섭(儀涉)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창건 당시에는 승당(僧堂)이라고 불렸으며 한편 이덕무가 여러 건물의 주련을 지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바뀌었으나 나유타료의 글귀만은 창건 당시의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부처가 알지못한 곳에 바로 이르렀어도 다만 이는 과정일 뿐이니
다시 부모미생전의 한구절로 도는 시험해보세.
直 佛祖不知處 祇是半塗且向父母未生煎 試道一句


총면적 86평으로 현재 대중회의때 사용하는 큰 방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여지고 있다. 큰 방 내부의 중앙에는 용상방(龍像榜)이 걸려 있는데, 용상방은 결제(結制)나 큰 불사가 있을 때 각자의 소임을 정하고 그 직책과 해당자를 명시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방이다.

내용을 보니 조실(祖室)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원장(院長) 송담대선사(松潭大禪師), 선덕(禪德) 노학대선사(老鶴大禪師)를 비롯한 30개의 직명과 스님이름이 적혀있어 중앙선원을 중심으로 한 편제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미 고인이 된 전강대선사가 조실로 올라 있다는 점인데. 이는 선원장인 송담선사께서 당신생존까지는 선사를 항상 조실로 모신다는 서원을 세웠던 까닭이라하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정성이라 하겠다.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안쪽에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있다. 밖에서는 천보루, 안에서는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진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겠다.

홍제루 현판의 동쪽 종루(從樓) 벽면에는 일제강점기에서 이름있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을 비롯한 30인의 문인묵객들이 당시 강대련 주지를 위해 기념휘호한 글들을 모아 판각해놓은 목판이 걸려있다.

창건당시 천보루의 앞뒷면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을 달았었는데 글귀는 다음과 같다.


앞면 ; 기러기·사자·비둘기 모양으로 나투는 여러 부처, 여러 천신이 영원히 보호하고, 소, 사슴, 양을 탄 선남 선녀가 한결같이 귀를 기울이네

뒷면 : 연화게와 패엽경을 불이문중의 하늘소리이고, 향기로운 밥과 창포떡은 무량겁전의 비옥한 땅이라.

부모은중경탑 왼쪽 건물이 호성전이다.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호성전안에는 사도세자(장조), 혜경궁홍씨(정조대왕 어머니), 정조대왕, 효의황후(왕비) 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호성전(護聖殿)과 부모은중경탑(父母恩重經塔)



(1) 懷眈守護恩(회탐수호은) 잉태하여 지켜주신 어버이의 크신 은혜
 
여러 겁에 맺고 맺은 인연법이 지중하여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버이를 의지했다
한달 한달 지나면서 오장육부 생겨나고      일곱 달에 접어들어 온갖 생각 열리도다
어머니의 몸무게는 산과 같이 무거워서      바람재앙 만난 듯이 가누기가 어려워라
아름다운 비단옷은 조금치도 관심 없고      단장하던 경대에도 먼지만이 쌓였도다
 


(2) 臨産受苦恩(임산수고은) 출산고를 모두겪은 어버이의 크신은혜
 
아기 밴지 어느새에 십 개월에 이르러서    해산고의 어려움이 하루하루 다가오네
아침마다 일어나면 중병걸린 사람같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정신마저 아득하네
두렵고도 떨리는 맘 기록하기 어려워라     근심걱정 눈물되어 옷섶가득 적시도다
슬픈 생각 머금고는 친족에게 이르기를     이러다가 아니죽나 두려울 뿐 이라하네
 


(3) 生子忘憂恩(생자망우은) 자식 낳고 근심 잊은 어버이의 크신 은혜
 
자비하신 어머님이 이내몸을 낳으실 때     오장육부 갈기갈기 찢어지고 열리는 듯
몸과 마음 모두 함께 끊어지고 베이는 듯   흘리신 피 얼마런가 도살장과 다름없네
갓난아기 건강하다 그 한마디 듣는 순간    기쁘고도 기쁜 마음 평소보다 더하여라
기쁜 마음 정해지면 아픈 고통 되살아나    해산후의 아픈 고통 심장까지 사무치네
 


(4) 苦吐甘恩(연고토감은) 쓴 것 단것 가려 먹인 어버이의 크신 은혜
 
부모님의 크신 은혜 깊고 또한 무거워라    사랑하고 보살피심 한순간도 쉼이 없네
좋은 음식 안 드시니 드실 것이 무엇이며   거친 음식 드시지만 얼굴빛은 변함 없네
지중하신 사랑따라 솟는 정이 한이 없고    깊고 깊은 은혜따라 애절함이 더하도다
어느때나 자녀들의 배무름만 생각할 뿐     자애하신 어머니는 허기짐도 사양않네
 


(5) 廻乾就濕恩(회건취습은) 마른자리 젖은자리 가려뉘신 크신 은혜
 
어머니는 그 스스로 진자리에 누우시고     어린아기 언제든지 마른자리 눕히시네
젖을 먹여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고     옷소매를 드리워서 찬바람을 가리시네
깊은 은혜 넓은 사랑 단잠조차 잊으시고    아기재롱 보시면서 즐거움을 삼으시네
다만 오직 아들딸이 불편할까 걱정할 뿐    자비하신 어머니는 편안함을 찾지않네
 


(6) 乳哺養育恩(유포양육은) 젖을 먹여 길러주신 어버이의 크신 은혜
 
어머니의 짠한 사랑 대지에다 비길건가    아버지의 엄한사랑 하늘에다 비길건가
덮어주고 길러주는 하늘땅의 은혜처럼     부모님의 크신 은혜 또한 그와 같으셔라
아기비록 눈없어도 미워하지 않으시고     손과 발이 불구라도 싫어하지 않으시네
뱃속에서 길러 낳은 한핏줄의 자식이라    평생토록 아끼시며 자애로써 베푸시네
 


(7) 洗濁不淨恩(세탁부정은) 온갖 수발 마다않은 어버이의 크신 은혜
 
젊으실 적 생각하니 연꽃 같은 피부셨고   아름다운 그 모습은 너무나도 고왔어라
버들같은 두 눈썹은 비취빛을 띄었었고    양쪽 볼에 붉은빛은 연꽃보다 고왔어라
자식사랑 깊을수록 옛모습은 없어지고     자식수발 드시느라 좋은 얼굴 상하시네
자녀들의 위한마음 언제든지 우선이고     어머니의 매무새는 나중에야 챙기시네
 


(8) 遠行憶念恩(원행억념은) 멀리 떠나있는 자식 걱정하는 크신 은혜
 
죽은 뒤의 이별이야 실로 잊기 어렵지만   살아 생전 헤어짐도 슬프기는 매한가지
자녀들이 집을 떠나 바깥으로 가게 되면   어버이의 마음 또한 타향으로 따라가네
낮이거나 밤이거나 마음 항상 따라가니    하염없는 눈물이여 수천 줄기 넘으리라
원숭이가 자식생각 달을 보고 울부짖 듯   생각 생각 끊임없어 애간장이 끊기도다


(9) 爲造惡業恩(위조악업은) 궂은 일도 서슴없는 어버이의 크신 은혜
 
어버이의 크신 은혜 강산보다 무거워서    그 은혜를 갚으려니 실로실로 어려워라
아들딸의 과로움은 대신받기 원하시고     아들딸이 힘이 들면 부모마음 편치 않네
사랑하는 아들딸이 멀리 있다 들으시고    고생하는 자녀생각 갈잎자리 마다않네
아들딸이 잠시라도 고생한다 들으시면     어버이의 쓰린 마음 영원토록 이어지네
 


(10) 究竟憐愍恩(구경연민은) 그 생명이 다하도록 연민하는 크신 은혜
 
어버이의 크신 은혜 깊고 또한 중하여라   깊고 깊은 그 사랑이 쉬실 때가 없으시네
행주좌와 어느 때나 마음 항상 따라가고   멀고 또한 가까움에 사랑의정 함께 하네
어버이는 연세드셔 일백세나 되신 뒤도    팔십먹은 늙은 자식 가엽다고 여기시네
크신 사랑 끊어질 날 언제일까 묻지말라   돌아가신 다음에야 바야흐로 다하시리

전강대종사(1898~1975)사리탑

전강대종사(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입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주사 대중들에게 크게 추앙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먼저 스님의 행장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스님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부친은 해룡(海龍), 모친은 황계수(黃桂秀)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들어가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고, 이후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 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스님은 23세가 되던 1921년 드디어 크게 깨달은 후 오도송(悟道頌)을 남겼으며, 이후 당대의 선백들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의 한암(漢巖)스님을 찾아가자 한암스님이 믇기를 "육조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불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계속해서 용성(龍城)·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을 찾아갔다가 더욱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스님은 처음에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했다가 재발심을 하고 다시 정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전법게(傳法偈)를 전수받으면서 선종 제 77대의 법맥을 계승하게 된다. 이후 33세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였다.또한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을 차례로 지냈으며, 스님은 이후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15여년에 걸쳐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스님의 선풍은 제자 송담(松潭)스님이 용주사에서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1962년 대구 동화사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조계종 장로원 장로를 역임하였으며,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하고 용주사 선풍 진작에 크게 공헌 하였다. 끝으로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조실을 역임한 스님은 1975년 1월13일 앉은 채로 입적에 들었다. 스님은 특히 수행자들을 위한 수많은 설법 테이프를 남겨 놓았으며, 《전강법어집이 제자들에게 의해 출판됨으로써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전강스님 오도송(悟道頌)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창 밖엔 갈대꽃 가을이로구나.
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류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 구나.




만공스님 전법게(傳法偈)



示 田岡永信(시 전강영신)



佛祖未曾傳(불조미증전) 부처와 조사도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고
我亦無所得(아역무소득) 나 또한 얻은 바 없다네.
此日秋色暮(차일추색모) 오늘 가을 빛 저물어 가니
猿嘯在後峯(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 봉우리에 있구나.


鏡虛門人 滿空(경허문인 만공)



천불전(千佛殿)

건물은 석조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마지막 아홉 번째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하였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였습니다. 이 삼세불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하여 조성한 것으로 머리 한가운데에는 붉은 계주를 넣었다.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爐殿), 또는 향로전(香爐殿)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던 곳dl다. 이 자리에 최근 3년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93년 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千佛殿)이라 이름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룬다.

시방칠등각은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하는 전각으로 칠성, 산신, 독성이 탱화로 봉안되어 있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용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한다.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용주사의 시방칠등각은 세 신을 함께 모신 전각이다.
그런데 이 전각 이름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매우 독특합니다. 그 뜻을 살펴보면 먼저 시방(十方)이란 동·서·남·북, 동북·동남·서남·서북, 그리고 상·하의 열 곳으로서 무수한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한다.

칠등(七燈)이란 칠성, 즉 북두 칠성을 가리키므로 시방칠등각은 결국 칠성각과 동일한 뜻이다. 이것은 절의 창건 당시 지금과 같은 시방칠등각이 아니라 칠성각이라는 전각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칠성각의 도편수는 경기도 안성 죽산 칠장사(七長寺)의 설잠(雪岑)스님이었고, 전각내에는 칠성여래사방칠성(七星如來四方七星幀)을 경옥(敬玉)·연홍(演弘)·설순(雪順)스님 등이 제작 봉안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이 걸려있었는데,


글귀는 아래와 같다.

이만리 아유타국 돌우물에는 공덕수가 널리 젖어들고,팔십경 기타원 좋은 밭에는 길상화가 가득 피었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면적 18평으로 아담한 규모이고 문은 띠살문이다. 건물외부 측면에는 산신과 독성을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내부에는 정면에 칠성탱화, 그 왼쪽에 산신탱화, 오른쪽에 독성탱화가 있고 최근작인 소규모의 석조 석가상이 안치되어있다.

불음각(佛音閣)

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한 불음각(佛音閣)에는 커다란 범종 하나가 걸려있는데, 네면에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조식하여 넣었다. 이 범종은 1985년에 조성 되었는데 그 소리가 영롱하여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예불 때마다 울리는 긴 종소리의 여운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중생의 귓가를 씻어내고 부처님의 미소 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말씀이 되어 혼탁한 하늘을 밝게 울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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