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복천암(福泉庵)

浮石 2011. 7. 22. 00:00

 

복천암 가는 길

복천암으로 가는 길에 보면 길가 커다란 바위에 누군가가 새겨놓은 이름들..

복천암 가는 길

문장대 올라가는 길인데, 숲이 울창하고 길 옆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풍광이 아름다운 마냥 걷고 싶은 길이다..

호서제일선원과 입구의 텃밭

 

 

복천암

꽤 오랜 세월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듯한 빗 속의 주목  한 그루..

복천선원

조금 전부터 중부지방 장마가 시작되었다.  화면 속에 빗줄기가 선명하다..

절 옆 큰 바위 틈에는 절 이름과 관련있는 샘인 복천이 있는데, 여기에 수각을 지어 샘(泉)을 보호하고 있다. 

 

 

사찰의 이름을 복천암이라고 한 까닭은 사찰의 한쪽 켠에 바위 사이로 물이 흘러 모이는데 마르지 않고 풍성하기 때문으로 이 물은 오래전부터 약수로 유명해 전국에서 이 물을 찾아 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 약수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조선조 세조 임금 당시에 임금님이 복천암을 들른 일이 있다.

세조는 세종의 아들로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임금이 된 인물로서 제대로 된 양위에 의해 권좌에 오른 것이 아니라 찬탈에 의해 임금이 되었는데 찬탈하는 과정에서 조카마저 죽이게 되는데 그 죄업 탓인지 임금이 된 이후 몸에 피부병이 돋아 쉽게 낳지 않았다.

이 피부병은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천벌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세조에게는 피부병의 고통보다 심적 고통이 더 컸었는데 세조는 왕이 된 이후 맘속의 병을 치유받기 위해 불교에 귀의했고 당시 많은 고승들을 궁궐로 불러 들여 법문을 듣고 마음을 치유했다.

그러던 중 세조는 복천암의 약수가 병에 특효가 있으니 행행할 것을 제안받고 복천암에서 신미()·학조()·학열() 등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깨끗이 낫자 이 절을 중수하도록 하고, 만년보력()’이라는 사각옥판을 내렸다 한다. 복천암은 세조의 피부병 만을 치유해준 것이 아니라 세조의 마음을 치료해준 것이다.

 

극락보전 옆의 절벽의 바위에  "남무아미타불"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동행한 친구의 선조중에 조선 중기의 시인이며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던 백호 임제[林悌]란분이 계셨다는데 그 분이 여기 복천암에서 공부를 하여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을 하셨다고 한다.. 친구는 같은 문인의 길을 걸었던 선조(白湖 임제선생)의 발자취를 느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黃眞伊)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님을 아쉬워 하며 시조 1수를 남겼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잡아 권할 이 없어 그를 설어 하노라"

이 때문에 부임하기도 전에 파직 당하기도 하였다.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등이 유명하다.

 

"북창(北窓)이 맑다거늘 우장 없이 길을 난이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이에 한우(寒雨)는 이렇게 화답하였다 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맛자신이 녹아 잘까 하노라."

 

문장과 시에 뛰어나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호방하고 쾌활한 시풍을 지녔다. 젊어서부터 방랑과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호협한 성격으로 유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