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陶山書院)
정문
도산서당
도산서당
퇴계 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다.
도산서원 전교당 입구인 진도문
도산서원 전교당 :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된 대강당이다.
도산서원의 사액현판이 게시되어 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광명실 :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로서 현판은 퇴계선생 친필이다. 동, 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지었다..
도산서원도 : 보물 제52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 강세황(1712∼1791)이 도산서원의 실경을 그린 것으로, 크기는 가로 138.5㎝, 세로 57.7㎝이다.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풍경을 그린 것으로 중앙에 도산서원을 배치하고 앞쪽에는 흐르는 강물과 함께 탁영담·반타석 등을 그렸다.왼쪽에는 곡류 위쪽으로 분천서원·애일당·분강촌 등을 그렸으며 본인이 직접 쓴 글이 적혀있다.여기에는 성호 이익이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자신에게 도산서원을 그리도록 특별히 부탁하였다는 것과 자신의 소감, 현지답사 내용 및 제작시기 등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다.또한 이 글의 끝 부분에는 1927년 가을 최남선이 쓴 글도 적혀 있다.서원의 배치, 건물의 크기와 방향 등이 실제와 부합되게 그려졌으며 건물의 이름도 함께 밝혔다.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마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것같이 섬세하게 산과 계곡을 표현하였으며 나무들은 붓을 눕혀 점을 찍듯이 나타내어 당시 유행하던 남종화풍의 초기적 필치를 느낄 수 있다.
혼천의(渾天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도하기 위하여 사용 하시던 기구이다.
구면(球面)에는 성좌의 위치가 그려져 있다..
역락서재(亦樂書齋)
퇴계선생이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사성(鄭士誠 : 芝軒)을 비롯한 뜻있는 제자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도산서원 입구의 왕버들
수고 20m 에 달하며 수피는 회갈색으로 깊게 갈라지며 피목이 있다. 겨울눈은 난형으로 털이 없다. 어긋나게 달리는 잎은 타원 또는 장타원형으로 표면은 광택이 있고 뒷면은 흰빛을 띤다. 새 잎은 흔히 붉은 빛을 띤다. 암수딴그루로 잎과 함께 미상화서로 꽃이 달린다. 수꽃이삭은 수술이 6개이고, 암꽃이삭은 화축에 털이 있으며 1개의 암술이 있다. 열매는 삭과로 5월에 익는다.
우리나라 충청 이남지역의 습지나 냇가에서 자라는 낙엽활엽교목이다. 국외로는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 분포한다.
도산서원 입구의 왕버들 나무 : 나무의 모양이 좋고, 특히 진분홍색의 촛불 같은 새순이 올라올 때는 매우 아름다워 도심지의 공원수나 가로수로 심는 데 적당하다.
도산서원 가는 입구에서의 안동호. 물이 가득하다..
자주 내린 비 탓으로 수위가 만수위인 안동호
시사단(試士壇) : 잦은 비 때문에 안동호 물이불어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시사단.
조선 정조 16년(1792)에 정조 임금이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 를 보인 장소이다.
총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뽑아 시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