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越 이야기

장릉(莊陵)

浮石 2013. 9. 9. 07:00

 

정자각(丁字閣)

정자각(丁字閣)

정자각(丁字閣)

고무래 정(丁)자 모양의 제향을 위한 건물로, 제례를 올릴 때 제수품을 진설하고 절을 올리는 정전(正殿)과 배위청(拜位廳)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정면 3칸, 측면 1~2칸의 구조를 갖는 맞배지붕의 형태이지만, 익랑을 붙여 다섯 칸 규모로 키우고 팔작지붕을 갖춘 경우(제18대 현종 숭릉)도 있다. 건물 양쪽으로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에 올라가는 계단[신계神階와 동계東階]이 있고, 서쪽에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있다. 신계와 동계는 신도ㆍ어도와 연결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신도ㆍ어도를 따라 걸어온 선왕의 영혼과 왕은 동계를 통해 정자각에 오른 뒤 제향이 끝나면 영혼은 정자각 뒷면의 신문으로 나가 신도를 따라 능으로 올라가고 왕만 정자각을 내려오므로 서쪽에는 계단이 하나밖에 없다. 정자각 뒷면의 신문과 신교 그리고 신도는 영혼이 봉분을 향하는 상징적 통로이다.

 

장릉 재실

건립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2년에 중건하였다.

이 곳에는 능을 지키는 참봉 1명과 수호군 9명이 기거하였으며 매년 단종제향을 지낼 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 기구를 보관해 오던 곳이다..

제례 때 사용하는 집기를 보관하고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 재실이다.

 

 

 

 

재실 마당의 향나무

1698년(숙종)에 장릉을 만들었으니 이 향나무의 수령은 300년이 넘은거 같다.

재실 안 향나무

영천(靈泉)

정조 때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 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다

영천(靈泉)

영천(靈泉)

이 아이들은 영천 우물속에 가득한 동전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단종왕의 제례에 사용되는 신성해야할 우물에, 관광객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빌기 위해 던져 넣은 동전들이 가득하다.. 

단종대왕 비각

 

단종비각

영조 9년(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릉비(端宗大王陵碑)와 비각(碑閣)이 정자각, 수복실과 함께 건립되었다.

비석 앞 면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수복실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 하던 곳으로 영조 9년(1733년)에 정자각과 함께 세운것이다..

장판옥(藏版屋)

정조 15년(1791년)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은 곳이다..

 

 

엄흥도 정려각

충신 엄흥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조때 세운 비각,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으로 있을때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시신을 암매장하였다. 

엄흥도는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박충원 낙촌비각

 

영월 장릉 경내 입구에 낙촌기적비각이 있으니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이 비각은 1974년 5월 5일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가 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 구신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길이 없어 풍설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을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능으로,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이 17세 되던 해에 죽음을 당하여, 그 주검이 강물에 띄워졌으나, 호장 엄흥도가 이곳에 암장하였다. 그후 숙종 때인 1698년에 와서야 단종이 왕으로 복권 되고 단종이 암장된 곳을 찾아 내, 왕릉으로 정비 하였다. 경내에는 정자각, 단종비각, 배식단사, 재실, 영천, 홍삼문, 신, 구도 등이 있으며,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다. 매 년 한식일에 한식제를 올리고 1967년부터 단종제를 거행하고 있다.

장릉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장릉으로 올라가는 길

 

영천에서 흘러나오는 영천수와 발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도랑을 이루어 장릉 밖의 장릉저수지로 모인다.. 

 

장릉내 연못의 연꽃..

단종제 때 칡줄다리기에 썼던 숫줄과 암줄이 결합되어있다..

 

칡줄다리기 행사장에는 12간지를 상징하는 12개의 화로가 불을 밝히고 단종 승하 556년을 상징하는 556개의 횃불이 밝혀져 칡줄과 횃불이 어우러지는 밤의 향연이 이어진다.
영월의 칡줄달리기는 단종이 복위되었던 숙종 임금때부터 칡줄다리기 놀이가 시작되어 일제 강점기 때 중단되었다가 1967년 단종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당고사를 지낸 다음 미리 준비해 두었던 칡줄을 가지 고 동강을 중심으로 동서 양편으로 나누어 강변둔치 모래밭에서 용두목으로 암수줄을 결합시킨 후 편장들의 지휘아래 줄다리기를 했다.
영월 칡줄다리기의 특징은 칡으로 기줄을 만들고 칡줄이 완성되면 단종대왕의 위패를 모셔놓고 고사를 올린 후에 줄다리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