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청주 중앙공원

浮石 2014. 8. 23. 07:00

 

충청북도 청주시 남문로 2가 92번지에 있는 청주 중앙공원(中央公園)은 1,300여년 동안이나 청주의 노른자위 역할을 해온 청주 역사의 산 증인이다. 여기서 말한 ‘노른자위’란 중심지라는 의미와 더불어 역사의 축에 서 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듯 청주는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이 되었고, 신문왕 9년(689)에는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서원경성의 치소(治所, 행정의 중심지)가 어디냐에 대해선 학설이 구구하다. 상당산성설, 우암산 토성설, 청주읍성설 등이 얽혀 있는데 보편적으로 학계의 폭넓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청주읍성설이다.

서원경성의 치소가 청주읍성이 확실하다면 그곳은 고대 청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역사의 파수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서원경성의 치소가 아니었다 해도 나말여초(신라 말 고려 초)부터는 명실 공히 청주의 자방(子房)역할을 해왔다.

국보 41호인 용두사지(龍頭寺址) 철당간은 나말여초의 사찰로 추정되는 ‘용두사’라는 절 입구에 있던 불기(佛旗)게양대이다. 당시에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황룡사(黃龍寺), 분황사처럼 절이 도시의 중앙에 들어서는 예가 흔하였다. 그리고 절 이름 중에 용(龍)자가 들어가면 일반적으로 사찰의 규모가 크다. 지난 1970~1980년대 용두사지(龍頭寺址) 일대와 중앙공원(中央公園)으로 통하는 하수도 공사과정에서 거북좌대 등 나말여초의 불교유물이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아마도 용두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 유물로 여겨진다. 이는 청주읍성이 고려시대에도 청주지역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앙공원(中央公園)은 삼국시대, 고려시대 읍성의 중심지였으며, 그 이후에도 조선시대 효종 2년(1651)에 충청병영이 충남 해미(海美)에서 청주로 옮겨왔을 때도 그 장소가 다름 아닌 현재의 중앙공원(中央公園)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앙공원과 압각수]
중앙공원(中央公園) 한 가운데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樹齡) 1000여년의 큰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그 잎이 오리의 발을 닮았다하여 압각수(鴨脚樹)라고 하며 공손수(公孫樹)라고도 불린다. 이 일대는 고려시대 이후 관아가 있던 곳으로 지금 남아 있는 압각수 외에도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이 나무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와 관련해서 『고려사(高麗史)』,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택리지(擇里志)』 등 고문서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와 그 일당이 역성혁명을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 ‘이초(李初)의 옥사(彛初獄事)’란 큰 사건이 있었다. 윤이(尹彛), 이초 두 사람이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명나라 세력을 빌어 이성계 일파를 타도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다. 윤이는 자신을 파평군(坡平君), 이초는 중랑장(中郞將)이라 사칭하고 명나라에 들어가 ‘이성계가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웠으나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다. 공양왕이 이성계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장차 명나라를 치려 하는 것을 이색(李穡)[1328~1396] 등이 반대하자 이색, 조민수 등을 살해하고 우현옥, 정지 등을 유배하였다. 유배된 재상들이 자기들을 보내었으니 군사를 일으켜 이성계 일파를 토벌해야 한다’ 고 무고했다. 이 무고는 명에 사신으로 간 순안군(順安君) 방(昉)과 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 조반(趙畔)을 통해 본국에 알려져 큰 옥사가 일어났다. 우현보 등은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고 이색, 이림(李琳), 정지, 이숭인, 권근(權近) 등은 청주옥에 갇혔다. 윤유린, 최공철, 홍인계는 옥사하여 효수(梟首) 되었으나, 청주옥에 갇힌 사람들은 불복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를 보내어 이들을 문초하였다. 이때 큰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물이 차고 큰 홍수가 났다. 옥리와 죄수들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겨우 목숨을 건졌는데 그때 죄수들이 올라가서 목숨을 구한 나무가 현재의 중앙공원 내에 있는 압각수라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공민왕(恭愍王) 때의 일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공양왕 2년, 5월 을사(乙巳)일 임이 확인된다.

이 기록의 나무가 지금의 압각수라고 고증(考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실여부를 떠나 청주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이 이야기를 입으로 전승(傳承)하며 의심 없이 진실로 믿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나뭇잎이 오리발처럼 생겨서 압각수()라는 이름이 붙은 은행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고려말 공양왕 때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 일파를 없애기 위해 중국 명나라로 가서 이성계가 공양왕과 함께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이색·정지·이승인·권근 등이 청주옥에 갇히고 문초를 받자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홍수가 났다. 이 때 근처에 나무가 있어 죄수들이 올라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 나무가 바로 압각수였다는 것이다.

 

 

청주시내 중심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시민을 위한 각종 음악회와 발표회가 열린다. 공원 안에 1,000년 된 은행나무인 압각수(충북기념물 5)와 목조 2층 누각인 병마절도사영문(충북유형문화재 15), 조헌전장기적비(충북유형문화재 136), 척화비(충북기념물 23) 등 유적이 많다.

청주 대한민국 독립기념비

대한민국의 광복과 정부수립을 경축하기 위해 1949년에 세운 비석으로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의 중앙공원(中央公園) 남쪽 출입구 앞에 있다. 비석은 2단의 지대석 위에 거북 모양의 대좌(臺座)를 설치하고 비신(碑身)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이다. 특히 지붕돌은 화강암으로 팔작지붕을 만들고 그 위에 두 마리의 용과 연꽃봉우리를 올린 특이한 형태이다. 비신은 흑요암 재질로 만들었으며, 높이 206㎝, 너비 87㎝, 두께 42㎝의 크기이다.[[淸州大韓民國獨立紀念碑] (두산백과)

 

[망선루]
중앙공원(中央公園) 북쪽 편에는 지난 2000년 12월에 청주제일교회에서 이건(移建) 복원한 망선루(望仙樓)가 위치하고 있다. 충청북도에서 발간한 문화재지(文化財誌)에 따르면 이 건축물은 객관 동쪽에 있어 취경루(聚景樓)라 하였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공민왕 10년 (1361) 홍건적의 난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왕은 공주와 더불어 남으로 파천하여 안동으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청주에서 문과와 감시(監試)를 행하고 방(榜)을 취경루(聚景樓) 상에 게재했다고 한다.

조선조에 누각이 퇴락하여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중수하고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현재의 망선루(望仙樓)로 고쳤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4권 「청주목(淸州牧)」). 하늘의 선녀 또는 신비한 경치나 은하수 등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한 목사(牧使) 이섬(李暹)이 중수하였고, 목사 이수득(李秀得)이 보수(保守)한 일이 있다. 그 후 청주보통학교 여자부 교사로 이용되다가, 일제 강점기인 1921년 유도장인 무덕전(武德殿) 신축으로 헐리게 되었다. 1923년 서문동 골목(현 조선면옥 뒤편)에 쌓아두었던 건축자재를 김태희(金泰熙) 등의 주선으로 남석교(南石橋) 언저리 청주제일교회 북동쪽으로 이건하여 청남학교 교사로, 또한 세광고등학교 교사로도 쓰였다. 그 이후 2000년까지 청주제일교회 건물에 인접·위치하여 교회의 교육관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 12월에 중앙공원(中央公園) 북쪽 척화비가 있는 부근에 망선루를 이전·복원하였다.

망선루는 고건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충청도 지방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목조 건축물이 별반 없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팔작지붕에다 겹처마를 했고 기둥은 전통양식인 배흘림기둥이다. 배흘림기둥이란 기둥 가운데 부분이 불룩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위 아래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형태를 말한다. 이로 인해 건물의 안정감과 균형미가 뛰어나다. 이층 마루는 우물마루 형태이다. 우물마루란 우물 정(井)자처럼 마루를 까는데 못을 쓰지 않고 가로, 세로로 짜 맞추는 형식을 말한다. 기둥 위에는 기둥머리가 있고 그 위로는 ‘도리’가 지나간다. 용마루와 같은 방향으로 놓인 것을 ‘도리’라고 하고 ‘도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을 ‘들보’라고 한다. 망선루의 ‘도리’는 맨 밖에 있는 ‘주심 도리’와 ‘중 도리’ 그리고 가운데를 지나가는 ‘종 도리’가 양쪽에서 대칭형을 이룬다.

건물이 크기 때문에 용마루를 받치는 대들보가 4개이고 대들보 위에는 이를 보좌하는 ‘종보’도 4개 있다. 종보는 대들보 보다 길이가 짧다. 전통적인 수키와 집으로 수키와 골 내림마루가 자연스럽게 하강을 하고 있으며, 추녀가 날렵하다. 주위로는 현간이 둘러쳐져 있다. 복원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해체를 해보니 부식이 심해 안정성이 없어 결국 3분의 2정도를 새 목재로 충당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