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동구릉(東九陵)

浮石 2015. 4. 15. 07:00

 

동구릉 재실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

문조는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효명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백선을 위한 정치를 펴기 위해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하였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 되었고 고종 때 다시 문조로 추존되었다.

신정왕후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819년 효명세자와(문조)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834년 부군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의 차남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 청정 하였다.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했다.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현릉()

 

문종의 능

문종은 제4대 세종의 맏아들로 8세에 세자가 되어 29년동안 세자 자리에 머물면서 학문을 익히고 정치 실무를 배웠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으나 건강악화로 재위 2년여 만인 39세에 승하했다.

현덕왕후 권씨의 능

현덕왕후는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로 1431년 세자(문종)의 후궁이 되었다. 1437년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올랐으며 1441년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떴다. 사후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추봉되었다.

조선 제1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태조 이성계는 1392년 개경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사대정책을 썼고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했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다툼이 화를 불러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고향 영흥으로 돌아갔다. 말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건원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조성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물이다.

태종 8년(1408)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건립시의 기본적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 제1대 왕 태조( 1335~1408, 재위 1392∼1398)의 무덤이다.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 사적 제193호) 경내에 있다.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능인 공민왕릉(현릉)을 본떠 만들었으나 고려시대 왕릉에는 없는 곡장(; 나지막한 담)이 봉분 주위를 두르고 있고, 석물들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난간석 밖으로는 왕을 지키는 영물인 석호()와 석양()을 4개씩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고,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다. 봉분 아랫단에는 석마()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2지신상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봉분을 감싸고,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비각

태조고황제건원릉(太祖高皇帝健元陵)

 

건원릉 신도비에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과 생애, 업적등이 담겨있다.

 

 

태조는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숨을 거뒀다. 영의정 하륜() 등이 산릉지()를 물색하다가 그해 6월 28일 현 위치로 결정하였고, 7월 5일 충청도·황해도·강원도에서 군정()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 말부터 역사()를 시작하고 석실을 만들었다. 9월 7일 태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발인하였다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장렬왕후는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로 1638년 인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고 효종,현종,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으나 인조와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휘릉의 정자각은 양 옆에 익랑이 붙어 있다.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

 

 

영조, 정순왕후릉

영조는 제19대 숙종의 넷째 아들로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붕당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백성들을 두루 살폈다. 조선 최장수 왕으로 보령이 83세에 이르며 재위기간은 52년이다.

 

정순왕후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1759년 15세 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로 책봉 되었다.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사도세자의 손자인 순조 때에도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누렸다.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