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창덕궁 석복헌(錫福軒)

浮石 2016. 7. 29. 06:00


헌종은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는데, 전례 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 이때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 중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으므로 효정왕후 홍씨가 계비로 간택된다. 이로부터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새로 맞은 후궁이 바로 경빈 김씨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석복헌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집이다.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는 석복헌에서 생활하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는 석복헌에서 1966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3년 환국한 영친왕 이은(:1897~1970)은 1970년 낙선재에서 생을 마쳤다.


낙선재 건립 이듬해인 1848년(헌종 14) 8월 11일, 헌종은 낙선재 동쪽에 석복헌을 지었다. 석복헌은 ‘복()을 내리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복()은 왕세자를 얻는 것이라 추측된다. 헌종은 후궁인 경빈 김씨를 지었다. 헌종은 왕비 효현왕후가 승하한 뒤, 1844년(헌종 10) 9월에 효정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3년 동안 후사가 없자, 1847년(헌종 13)에 새로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였고, 이듬해에 그녀가 거처할 석복헌을 지어준 것이다. 정조를 닮고 싶어 했던 헌종은, 후궁을 들이는데 있어서도 그 전례를 따랐다.

정조가 정미년인 1787년(정조 11)에 후궁 수빈 박씨를 들인 것처럼, 헌종은 그로부터 꼭 60년만인 1847년 (헌종 13) 정미년에 경빈 김씨를 선발했다. 그리고 정조가 수빈 박씨를 맞아들인 예에 따라 헌종은 경빈 김씨와 가례를 거행하였다. 이는 장차 후궁을 통해 태어날 원자의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헌종은 석복헌을 새로 지으면서, 그 옆의 수강재도 함께 중수()하였다. 수강재 중수 상량문에는 수강재를 고쳐지은 이유를 육순을 맞이한 대왕대비의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서경()]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복() 중에 장수와 강녕을 기원하는 이곳 수강재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머물렀다. 수강재 중수에서 주목되는 점은, 정비가 아닌 후궁 경빈 김씨의 건물과 순원왕후의 건물이 나란히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경빈 김씨의 위상을 높이고 그 후사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이려 했던 헌종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정조는 창경궁에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殿)을 짓고 자신은 근처인 영춘헌()에 기거했으며, 결국 서쪽 집복헌()에서 수빈 박씨가 순조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