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봉영사(奉永寺)

浮石 2017. 2. 2. 06:00


봉영사는 진접읍 내각리 천점산 기슭에 있는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은 599년(진평왕 21)이었으며, 처음에는 봉인암(奉仁庵)이라고 하였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있다.  

1737년(영조 13)에는 태전(太顚)·해청(海淸)·치학(致學) 등이 황폐해진 절을 중창하였고 1755년 선조의 후궁 인빈(仁嬪) 등의 묘가 있던 순강묘소(順康墓所)가 순강원(順康園)으로 승격되면서 이 절을 인빈의 원찰로 삼아 이곳에 신실(神室)을 지었으며, 절 이름을 봉영사라고 부르게 되었다.이 때 토지 10결을 내려 설날과 추석에 제사를 모시게 했다.  


1877년(고종 14) 정승이자 고종의 숙부인 이공(李公)이 신실이 무너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내탕금 4000관을 하사받아 대대적인 중수공사를 하였다. 1902년에는 전동희(全東熙)화상이 법당에 삼존불을 봉안하였는데 1920년 여름 수해로 거의 폐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범궁(梵宮)과 요사채를 중수하였다. 전동희화상은 호가 서경(西耕)이며, 회양(淮陽)인이다. 매우 강직한 성품으로 재물을 정의로운 곳에 썼으며 근면함이 독실하였다. 무릇 사물에 대해서는 공과 이익을 탐하지 않았으며 그 덕과 의리는 드높아 부끄러운 바가 없었다고 한다.  

보개산에서 봉영사로 옮겨온 이후 절이 폐허화된 것에 분개하여 절의 재산을 마련해 도량을 중수하고 다스리는 데 정력을 기울였으며, 불교의 쇠퇴를 아쉬워하며 불교경전을 연구하였다.그 후 1942년에는 주지 성호(星浩)스님이, 1968년에는 혜경(慧鏡)스님이 중수했다. 그리고 1971년 대웅전 앞에 있던 큰방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고 1980년에는 법당 동쪽에 있던 어실각을 2칸에서 3칸으로 확장하였다


무량수전

지장전


천점산 봉영사 현판

종무소


봉영사(奉永寺)는 경기도 남양주시 천점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원찰(願刹)이란 다른 말로 원당(願堂)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원(願)을 빌어주는 곳을 말한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는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을 일관되게 지속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하지만 유교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관이나 규범 등에 치우칠 뿐 사람들이 가지는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과 현실의 고통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죽은 자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게하고, 자신들의 복을 빌어줄 곳은 불교밖에는 없다고 여기는 백성들은 불교를 계속 신봉하였다. 또한 왕실이나 양반들도 개인적으로는 원찰을 만들어 조상의 영혼을 위로하고 자신의 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