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흥법사지(原州興法寺址)
흥법사지는 법천사지처럼 드문드문 민가가 들어선 넓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이 서로 의지한 채 제자리를 지킨다.
흥법사지 삼층석탑(原州興法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464호.
높이 3.69m. 흥법사터에는 이전부터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제365호)과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의 귀부를 비롯하여, 높이 약 3m, 길이 약 60m 규모의 석축, 문터, 여러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 이 가운데 진공대사탑은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여전히 절터에 자리하고 있다. 절터는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석탑은 밭 가운데에 서 있다.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이다. 바닥돌 위에는 하대석(下臺石)과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을 하나의 돌로 만든 4장의 널돌이 올려져 있다. 면석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새기지 않고 대신 안상(眼象) 3구씩을 새겨 놓았는데, 안상 안에는 꽃 무늬가 오목새김되어 있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2장의 널돌로 구성된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너비가 좁은 편인데, 윗면의 경사가 심하여 특이하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 새겨진 얇은 1단의 굄은 간략화 과정을 보여준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여러 장의 널돌로 불규칙하게 구성되었는데, 규모는 매우 큰 편이지만, 너비가 좁은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2장의 널돌로 덮은 윗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평박(平薄)해 보인다.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없고, 윗면에는 경사가 있으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3단의 각진 받침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받침돌에 비해 크기가 급격히 작아져 좋은 비례라고는 할 수 없다. 곧 1층 몸돌의 너비는 반으로 줄었고, 높이도 약 2/3로 줄었으며, 2층 이상의 몸돌 높이는 1층 몸돌에 비해 2/3로 줄었기 때문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가느다란 모서리 기둥만 조각되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은 추녀 부분이 많이 손상된 상태인데, 밑면 받침은 각 층마다 4단이고, 얕은 밑면 받침에 비해 윗면인 낙수면은 두꺼워 경사가 심하다. 추녀 밑은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反轉)을 보인다. 각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각진 굄이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심하게 손상된 노반만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의 비례가 맞지 않고, 석재 구성이나 표면 조각도 기백을 잃고 약체화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고려 초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공대사탑비는 비신이 넘어져 잔해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았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잘생긴 용의 모습을 표현한 귀부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입체감이 느껴지는 네 마리 용이 새겨진 이수가 제법 볼 만하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이다.
1984년 6월 2일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5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사》에는 937년(태조 20) 당시 왕사(王師)였던 진공대사 충담(忠湛)이 입적하자 940년 진공대사의 부도탑이 있는 원주 영봉산(靈鳳山) 흥법사에 태조가 직접 비문(碑文)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흥법사가 신라 때부터 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법사의 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변했다.
이곳에는 삼층석탑보물 464), 진공대사탑(보물 365), 진공대사탑비,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104)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염거화상탑은 서울의 탑골공원으로 옮겨지고 진공대사탑과 진공대사탑비의 비신(碑身)은 일본으로 반출된 것을 되찾아 지금은 3점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