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광주시 남종면 검천리(능곡마을)
浮石
2006. 7. 16. 01:52
남종면의 지명유래
![]() 조선조 시대 궁중에서 쓰는 사기그릇을 관장하던 사옹원(司甕院)의 현지 제작소가 있던 곳으로서 분점이란 뜻에서 분원이라 불리웠다. 영조시대에는 분루원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는 옹기 및 사기를 구워파는 시장이 오랜동안 번창하였으나 을측년 대홍수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나 광주 분원하면 지금도 사기(司器)그릇을 연상하는 곳이다. ![]() 능곡ㆍ알미ㆍ종단의 세 자연부락을 합하여 원래는 '사천리'(四川里)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개천을 측량한 이후에는 '검천리'라 부르게 되었다.
![]()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줄기가 하도 맑고 푸르러서 이름을 푸르레여울'이라 부르고 한자이다. 윗마을은 '청탄' 아랫부락은 '작은청'이라 부른다.
![]() 조선조 중종때 정승 한 분이 이곳에 낙향하여 귀여정(歸歟亭)이란 정자를 짓고 소일하였다고 하여 이 마을을 '귀여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 '귀여리'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 옛부터 이마을 앞으로는 하천이 하나 있는데 이 하천에는 사금(砂金)이 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 마을을 '金沙里'라 부르게 되었다.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삼정동'(三政洞), '과학동(過鶴洞), '족자동'(族子洞)을 합하여 '세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으로 '삼성리'라 부르게 되었다.
![]() 이곳은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이 개편도던 이전 시기까지는 성림동(聖林洞)이라 부르다가 조선조 말기 고종의 자(字)가 성림(聖臨)이라 황공하여 석림(石林)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웃의 석조정(石潮亭)을 합하여 '이석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