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능성 구씨(具氏) 시조묘

浮石 2011. 11. 5. 00:00

 

 

능성구씨 시조묘 입구의 홍살문과 520년 된 느티나무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정동마을)에 있는 능성구씨 시조묘.

 

능성 구씨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무신가문으로 꼽혔다.
세조때부터 21대 영조까지 3백여년간 많은 장신과 공신을 배출했고 중종·인조반정등에 직·간접으로 활약, 권력의 핵심에서 조선조의 정치·사회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75년 국세조사에서 남한의 능성 구씨는 2만6천9백61가구13만여명. 성별인구순위 37위를 기록했다. 전체인구에 대한 비율은 0.4%.
45%가 영남지방에 집중돼 있고 20%가 서울·경기지방에 사는 특징을 인다.
시조는 고려때 삼조삼중대광검교상 장군을 지낸 벽상공신 구존유.
그의 선대는 분명치 않은데「동사보유」와「주청계공실기」에 따르면 신안주씨의 시조 주잠의 사위로만 기록되어있다. 전남 능성현(현 능주면 고정리)에 은거하던 주잠은 1남1녀를 두었는데 딸이 구존유에게 출가, 능성에 살게 되면서 능성 구씨 가 비롯됐다는 것.

능성 구씨는 고려말∼조선초 시조의 6대손때부터 10개파로 갈렸다.
판사(시조 현좌) 시랑중(영량)·좌정승(홍)·판안동(성량) 도원사(성로) 재신(성덕)·낭장(현보)·감무(현기)·팜판(성미)·문천군사(원립)파등이다.
그중 좌정승·판안동·도원사파가 구씨 전체인구의 80%를 차지할 만큼 가장 번창하며 특히 전체인구의 40%나되는 도원사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좌정승·판안동·도원사·재신파의 시조는 홍·성량·성로·성덕등 4형제. 이들 형제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큰 활약을 했고 이때부터 능성 구씨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세조때 구치관이 영의정에 올랐고 중종·인조 두차례 반정에 모두 공신으로 가담해 더욱 확고한 기반을 닦았다.
능성 구씨·대종회에 따르면 능성 구씨는 조선조때 5백62명의 과거급제자를 냈다. 상신2명·왕비l명·부마4명·공신10명·장신(등단대장) 10명·판서12명.
그중 진사 1백44명·문과 55명·무과 3백63명으로 문·무가 함께 있으나 대제학을 지낸 사람이 1명도 없는 반면 무과는 65%나 돼「무신집안」이라는 칭호를 받게됐다.
파별로는 도원사파 3백59명, 판안동파 72명, 좌정승파 42명으로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숱한 현직을 낸 능성 구씨들이 또달리 절개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선조는 좌정승파 시조 구홍과 구인문.
구홍은 두문동 72현으로 고려 우왕때 좌시중(부수상)을 지내고 조선개국때는 이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죽었다.
그는 죽을 때 이태조가 내린 좌의정이란 조선관함을 쓰지말라고 후손에게 유언까지 했다. 그러나『자손들이 왕명을 어기기 어려워 명정(상여앞의 깃발)에 좌의정이란 관직명을 썼다고 한다. 그러자 출상때 돌풍이 불면서 깃발이 찢어졌다. 후손들이 고려때 관직 좌시중을 썼더니 바람이 잦다는 것이다.
일제때는 구여순·구연영등이 항일운동가로 조국광복에 앞장섰다.
구여순은 24세때 3·l독립운동으로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뒤 22년 상해로 망명했다.

<절개의 상징 구홍>
23년봄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표자대회에서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과 임시정부 개조를 주장했으나 실현되지 않자 무력투쟁의 기치를 내건 의열단에 가입, 광복을 위해 싸웠다. 구여순은 의열단에서 강홍렬등 5명과 함께 조선척식회사·조선은행·종로경찰서 폭파등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4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구연영은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다 기독교에 귀의, 전도사로서 청년운동에 앞장서 민족계몽활동을 했다. 국채보상운동·일진회 규탄·배일운동등을 외치며 활동하다 아들정서와 함께 체포돼 l907년 총살당했다. 해방후 63년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능성 구씨 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집안은 구인회(69년작고)전 럭키 그룹회장집안.
구인회는 도원사파로 시조 구존유의 26세손.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회인「구인상회」를 경영하다 47년1월 부산에서 락희화학공업을 설립, 오늘의 럭키 금성그룹을 이루었다.
구인회는 락희산업(53년설립), 금성사(58년) ,한국케이블(62년), 호남정유(67년) 한국콘티넨탈·카본(68년) 금성통신(69년) 럭키개발(69년)등을 계속 설립, 대재벌로 키웠다.
포천지에 따르면 81년도 매출액기준으로 미국을 제외한 기업중 9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구인회는 6형제중 장남으로 69년 연암문화재단을 설립한 후 작고했지만 구태회(전 공화당의장·럭키 금성그룹고문), 구평회(호남정유사장), 구두회(금성반도체사장)등 형제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있다.
70년1월 유업을 이어받은 구자경 럭키 금성그룹회장(6남4녀중 장남)은 금성전기·희성산업·금성반도체등 9개회사를 새로 설립하는등 사세를 확립, 20개 자매회사를 거느린 총수로 활동하고 있다.

<구인회, 도원사파>
구자경회장 집안의 가훈은 구인회 전회장때부터 내려온「인화」. 회사경영에도 이를 적용, 운영하는 관계로 럭키 금성그룹이 가족 경영체제이지만 흔히 있는 후계자들간의 재산권 다용이 전혀 없는 것이 특색이다. 또 문중일에도 열심이다.
현재 능성 구씨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역시 실업계. 럭키그룹의 구봉조(옥동철광사장) 구연이(동해투자금융사장)등 전·현직 실업인이 수두룩하다.
구연철(이대교수)·구영회(미 오도바인대학장)·구연회(서울인교수)등 27명의 교수와 구본석(서울시교육감)등이 교육계에서 활약한다.
구상(시인)·구중서(문학평론가)등이 문학계에서, 구봉서(코미디언)·구민(성우)등이 연예계에서, 구박(KBS심의실장)·구종서(중앙일보출판국주간)가 언론계에서 활약하는 구씨가의 인재들.
이밖에 5·16혁명주체세력으로 서울시경국장·서울시장·내무장관을 지낸 구자춘을 비롯, 구태회(전국회부의장·공화당의장) 구범모(전서울대교수·국회의원)등이 관계·정계에서 한시대를 누볐었다.

 

능성구씨 시조이신 구존유(具存裕)할아버님과 신안주씨 할머님 양위분의 壇所..

 

능성구씨(綾城具氏) 연원

능성구씨시조(始祖)인 구존유(具存裕) 이전의 구씨(具氏)를 찾아보면 고려(高麗) 태조(太祖) 원년(918)에 궁예(弓裔)의 태봉국(泰封國) 시중(侍中)이었던 구진(具鎭)이 나주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에 임명되었고, 후백제(後百濟)의 장군 구도(具道)와 그의 아들 구단서(具端舒)가 있었으며, 고려 숙종(肅宗) 6(1101)에 탐라(耽羅=지금의 제주) 성주(星主) 배융부위(陪戎副尉)인 구대(具代)가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임명되었던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전고(典考)가 없어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始祖)인 구존유(具存裕)와 이들과의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구씨(具氏)가 당시 나주(羅州)나 능성(綾城) 지역의 토착 성씨(姓氏)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능성현(綾城縣) 토성조(土姓條)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능성현(綾城縣) 토성조(土姓條)에도 구씨(具氏)를 능성현(綾城縣)의 대표적인 성씨 (姓氏)로 기록하고 있다.

능성구씨(綾城具氏)는 구존유(具存裕)를 시조(始祖)로 하며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하였던 7()의 인물들을 파조(派祖)로 하여 판사파(判事派)⋅전서파(典書派-无后)⋅시랑파(侍郞派)⋅좌정승파(左政丞派)⋅판안동파(判安東派)⋅도원수파(都元帥派)⋅재신파(宰臣派-在北)⋅낭장파(郎將派)⋅감무파(監務派)⋅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无后)⋅참판파(叅判派)⋅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  12개 파()로 분파(分派)하였다. 이 중에서 이북지방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는 하나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전고(典考)를 알 수 없는 재신파(宰臣派)와 후손이 없어 무후(无后)된 전서파(典書派)와 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  3개 파()를 제외한 9개 파()의 후손들이 실존하여 번영하고 있다.

2001년에 능성구씨사적비(綾城具氏事蹟碑)를 시조(始祖) 단역(壇域)에 건립하였다. 글은 LG그룹 명예회장이며 능성구씨대종회(綾城具氏大宗會) 회장인 구자경(具滋暻)이 짓고 글씨는 능성구씨대종회(綾城具氏大宗會) 수석부회장인 구왕회(具旺會)가 썼다.

능성구씨본관(本貫) 연혁(沿革), 능성구씨조상

능성(綾城)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綾州)의 옛 지명으로 백제(百濟) 때 이릉부리군(尒陵夫里郡)ㆍ죽수부리(竹樹夫里)ㆍ 인부리(仁夫里) 등으로 불리어지다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능성(綾城)이라 개칭되었으며, 고려(高麗) 초 나주(羅州)에 소속시켰다가 고려() 인종(仁宗) 21(1143)에 현령(縣令)을 두었고, 조선(朝鮮) 인조(仁祖) 10(1632)에 인헌왕후(仁獻王后=원종의 비)의 관향(貫鄕)이라고 하여 능주(綾州)로 승격시켜 목사(牧使)를 두었으며, 1913년에 능주군이 화순군에 편입되었다.

능성구씨시조(始祖) - 구존유(具存裕)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始祖)는 구존유(具存裕)이다. 그는 고려(高麗) 문괴(文魁=문과 장원)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에 올랐다. 그의 배위(配位)는 신안주씨(新安朱氏)이며, 장인(丈人)은 송()나라 사람인 청계(淸溪) 주잠(朱潛)이다.

()나라가 몽고(蒙古, 뒤에 원나라가 됨)에게 패망하자 주잠(朱潛)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11(1224)에 엽공제(葉公濟)⋅진조순(陳祖舜)  7학사(學士)와 함께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으로 망명해 왔으며 원()나라가 이들 망명객을 추적하자 이름을 적덕(積德)이라 고치고 능주(綾州=綾城) 고정리(考亭里)에 숨어 살았다.

구존유(具存裕)는 주잠(朱潛, 호는 淸溪)의 딸과 혼인(婚姻)하여 능성구씨(綾城具氏) 번성(蕃盛)의 기틀을 세웠다. 주자학으로 유명한 회암(晦庵) 주자(朱子=朱熹)는 그의 처고조(妻高祖)가 된다.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始祖)인 구존유(具存裕)의 묘소(墓所)에 대하여 전남 화순군 춘양면 천태산(天台山) 좌측 풍취라대형(風吹羅帶形)이라는 기록은 있으나 실전(失傳)하여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설단(設壇)하고 1979년에 단비(壇碑)를 세웠는데 24대손 구행서(具行書)가 비문(碑文)을 짓고 25대손 구회승(具會升)이 글씨를 썼다. 그 후 1999년에 알기 쉽게 번역한 단비(壇碑)를 위엄을 갖추어 개수(改竪)하였으니 LG그룹 명예회장이며 능성구씨대종회(綾城具氏大宗會) 회장인 26대손 구자경(具滋暻)이 개수기문(改竪記文)을 짓고 27대손 구본혁(具本赫)이 글씨를 썼다.

2 - 구민첨(具民瞻)

2世 구민첨(具民瞻)은 시조(始祖) 구존유(具存裕)의 아들로서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全州) 고을의 사록참군(司錄叅軍) 겸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정2품인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올랐다. 배위(配位)는 면천복씨(沔川卜氏)이며, 장인(丈人)은 고려(高麗) 봉정대부(奉正大夫) 복윤량(卜允亮)이고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 무공공(武恭公) 복지겸(卜智謙)의 후손이다.

구민첨(具民瞻)의 묘소(墓所)는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 자좌(子坐)에 배위(配位)와 함께 상하봉(上下封)으로 모셔져 있다. 묘표(墓表) 11대손 구봉령(具鳳齡)이 짓고 중건묘표(重建墓表)는 영상(領相) 조현명(趙顯命)이 지었으며 18대손 구택규(具宅奎)가 쓴 것을 2001년에 알기 쉽게 번역한 개수비(改竪碑)를 묘소 입구에 세웠으니 LG그룹 명예회장이며 능성구씨대종회 회장인 25대손 구자경(具滋暻)이 개수기문(改竪記文)을 짓고 능성구씨부산광역시종회 회장인 25대손 구자호(具滋毫)가 글씨를 썼다.

3 - 구연(具珚)

3世 구연(具珚) 2世 구민첨(具民瞻)의 아들로서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면도감판관(安東面都監判官)을 지냈으며 일곱째 아들인 구예(具藝)의 귀현(貴顯)으로 문하좌정승면성부원군(門下左政丞沔城府院君)을 추증(追贈)받았다. 배위(配位)는 면천한씨(沔川韓氏)이며, 장인(丈人)은 고려(高麗)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한자희(韓子禧)이다.

구연(具珚)의 묘소(墓所)는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신좌(申坐)에 배위(配位)와 함께 상하봉(上下封)으로 모셔져 있다. 묘표(墓表)는 부제학(副提學) 이종우(李鍾愚)가 짓고 중건묘표(重建墓表)는 판서(判書) 박규수(朴珪壽)가 지었으며 대사헌(大司憲) 이원명(李源命)이 글씨를 썼다. 1949년에 묘비(墓碑)를 다시 세웠는데 22대손 구행서(具行書)가 묘표추기문(墓表追記文)을 지었다. 그 후 2001년에 알기 쉽게 번역한 묘비(墓碑)를 개수하였으니 LG그룹 명예회장이며 능성구씨대종회 회장인 24대손 구자경(具滋暻)이 개수기문(改竪記文)을 짓고 능성구씨서울특별시종회 회장인 24대손 구자남(具滋南)이 글씨를 썼다.

4 - 구의(具宜)

4世 구의(具宜) 3世 구연(具珚)의 장남으로서 고려(高麗)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22(1296)에 경주판관(慶州判官)을 거쳐 이듬해인 1297년에 시랑(侍郞)을 역임하고 삼사소윤(三司少尹)을 지냈다. 묘소(墓所)는 실전(失傳)하여 충남 당진군 정미면 봉생리에 설단(設壇)하였다.

5 - 구해(具㧡)

5世 구해(具㧡) 4世 구의(具宜)의 차남으로서 고려(高麗) 때 좌우위총제(左右衛摠制)를 지냈고 중현대부(中顯大夫)로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역임하였다. 묘소(墓所)는 실전(失傳)하여 충남 당진군 정미면 봉생리에 설단(設壇)하였다.

6 - 구서진(具瑞珍)

6世 구서진(具瑞珍) 5世 구해(具㧡)의 장남으로서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지영주부사(知寧州府事)를 지냈고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역임하였다. 장남인 구현좌(具賢佐)는 판사파(判事派) 파조(派祖)이고, 차남인 구현로(具賢老)는 전서파(典書派) 파조(派祖)이다. 묘소(墓所)는 실전(失傳)하여 충남 당진군 정미면 봉생리에 설단(設壇)하였다.

4 - 구이(具怡)

4世 구이(具怡) 3世 구연(具珚)의 다섯째 아들로서 고려(高麗) 때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다.

4 - 구천용(具天容)

4世 구천용(具天容) 3世 구연(具珚)의 여섯째 아들로서 고려(高麗)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배위(配位)는 인천채씨(仁川蔡氏)이며, 장인(丈人)은 고려(高麗) 판도판서(版圖判書) 채기인(蔡器仁)이다. 묘소(墓所)는 실전(失傳)하여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설단(設壇)하였다.

5 - 구식(具軾)

5世 구식(具軾) 4世 구천용(具天容)의 장남으로서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신안주씨(新安朱氏)이다. 묘소(墓所)는 실전(失傳)하여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설단(設壇)하였다.

6 - 구록(具祿)

6世 구록(具祿) 5世 구식(具軾)의 차남으로서 고려(高麗) 때 무과에 급제하여 군사(郡事)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장인(丈人)은 김인(金仁)이다. 장남인 구영량(具英良)은 시랑파(侍郞派) 파조(派祖)이다. 묘소(墓所)는 실전(失傳)하여 전남 화순군 한천면 정리에 설단(設壇)하였다.

4 - 구예(具藝)

4世 구예(具藝) 3世 구연(具珚)의 일곱째 아들로서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4(1317)에 구재삭시(九齋朔試)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이 중대광판전의시사(重大匡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면주(沔州)를 사향(賜鄕) 받고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배위(配位)는 아주신씨(鵝洲申氏)이며, 장인(丈人)은 고려(高麗) 도염서령(都染署令) 신진승(申晉升)이다. 구예(具藝)가 별세(別世)하자 배위(配位) 아주신씨(鵝洲申氏)는 그의 묘소(墓所) 국내에 암자(庵子, 신암사)를 짓고 인도(印度)에서 불상(佛像)을 모셔와 남편을 위한 극락왕생(極樂往生)의 기도를 올렸다. 지금도 신암사(申菴寺)에는 구예(具藝)와 배위(配位) 아주신씨(鵝洲申氏)의 위패(位牌)가 봉안(奉安)되어 있으며, 인도에서 모셔온 불상(당진신암사금동불좌상) 1989년에 보물(寶物) 987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묘소(墓所)는 충남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 자좌(子坐)에 배위(配位)와 함께 상하봉(上下封)으로 모셔져 있다.

5 - 구영검(具榮儉)

5世 구영검(具榮儉) 4世 구예(具藝)의 장남으로서 초휘(初諱)는 구정(具貞)이다.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중대광전리판서(重大匡典理判書)에 올랐고 선충익찬공신(宣忠翊贊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으며 면성군(沔城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배위(配位)는 죽산안씨(竹山安氏)와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장인(丈人)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안규(安珪)와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김자장(金子章)이다. 묘소(墓所)는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봉래리 계좌(癸坐)에 모셔졌으나 남북 분단으로 첨소봉영(瞻掃封塋) 할 수 없어 충남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에 모셔진 4世 구예(具藝)의 묘소(墓所) 아래에 망제단(望祭壇)을 세웠다.

6 - 구위(具褘)

6世 구위(具褘) 5世 구영검(具榮儉)의 장남으로서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소부윤(少府尹)을 지냈고 장자인 구홍(具鴻)의 귀현으로 삼중대광문하좌정승(三重大匡門下左政丞)과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이조사(知吏曹事)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과 문정(文貞)의 시호(諡號)를 추증(追贈)받았다. 배위(配位)는 경주박씨(慶州朴氏)이며, 장인(丈人)은 고려(高麗) 보문각태학사문하시랑평장사(寶文閣太學士門下侍郞平章事) 문정공(文貞公) 박세태(朴世泰)이다. 구위(具褘)는 슬하에 아들 5형제와 딸 9자매를 두었다. 장남인 구홍(具鴻)은 좌정승파(左政丞派) 파조(派祖)이고, 차남인 구성량(具成亮)은 판안동파(判安東派) 파조(派祖)이고, 3남인 구성로(具成老)는 도원수파(都元帥派) 파조(派祖)이고, 4남인 구성우(具成祐)는 형조판서(刑曹判書)와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역임하였는데 무후(无后) 되었고, 5남인 구성덕(具成德)은 재신파(宰臣派 - 在北) 파조(派祖)이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개풍군 남면 율응리 인좌(寅坐)에 모셔졌으나 남북 분단으로 첨소봉영(瞻掃封塋) 할 수 없어 충남 당진군 송악면 가교리에 모셔진 4世 구예(具藝)의 묘소(墓所) 아래에 망제단(望祭壇)을 세웠다.

6 - 구흥(具興)

6世 구흥(具興) 5世 구영검(具榮儉)의 차남으로서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예의시사(判禮儀寺事)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중대광문하찬성사(重大匡門下贊成事)를 증직(贈職) 받았다. 배위(配位)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구흥(具興)은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니 장남인 구현보(具賢輔)는 낭장파(郎將派) 파조(派祖)이고, 차남인 구현기(具賢器)는 감무파(監務派) 파조(派祖)이고, 3남인 구충로(具忠老)는 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 파조(派祖)이다. 묘소(墓所)는 실전(失傳)하여 충남 서천군 비인면 구복리에 설단(設壇)하였다.

6 - 구의(具義)

6世 구의(具義) 5世 구영검(具榮儉)의 넷째 아들로서 고려(高麗) 때 상정의대부(上正議大夫)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배위(配位)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이며, 장인(丈人)은 경산부사(京山府使) 남궁찬(南宮贊)이다. 구의(具義)는 슬하에 3남매를 두었으니 장남인 구성미(具成美)는 참판파(叅判派) 파조(派祖)이고, 차남인 구원립(具爰立)은 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 파조(派祖)이다. 묘소(墓所)는 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자좌(子坐)에 모셔져 있다.

 

 

능성구씨의 시조이신 구존유(具存裕)할아버님은 벽상삼한삼중대광검교상장군() 을 지내셨다..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구존유(具存裕)는 고려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을 지냈다.

능성 구씨(綾城具氏)의 시조는 고려에서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훈직을 받은구존유(具存裕)이다.

 

2세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구민첨(具民瞻), 3세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연(具珚), 4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5세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영검(具榮儉), 6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구위(具禕)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구흥(具興)과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구의(具義)가 있다. 고려 말 좌시중(左侍中) 7세 문절공(文節公) 구홍(具鴻)은 조선의 개국에 협력하지 않고 은둔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조선시대에는 지속적으로 관직에 진출하고, 조선 왕실의 인척이기도 했다. 능성 구씨는 무인의 명가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구사직(具思稷), 훈련대장 등을 지낸 구굉(具宏), 어영대장인 구인후(具仁垕), 총융사(摠戎使)인 구인기(具仁墍), 어영대장인 구문치(具文治), 총융사인 구감(具鑑), 훈련대장인 구성임(具聖任), 훈련대장인 구선복(具善復) 등이다. 이 중 구굉·구인후·구인기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또한 세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具致寬), 강릉대도호부사를 지낸 구치홍, 성종때 상주목사를 지낸 구치명, 경상우도절도사를 지낸 구겸, 중종반정(中宗反正)의 정국공신(靖國功臣)인 구현휘(具賢暉)·구수영(具壽永),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인 능원군 구문신(具文信) 등이 있다. 중종의 부마 구사안(具思顔), 인조의 외조부이며 이조판서·좌찬성·숭록공신(崇祿功臣)에 오른 구사맹(具思孟), 시문에 뛰어나고 관찰사·참판·대사헌을 지낸 구봉령(具鳳齡) 등이 있다. 조선의 왕족으로는 원종의 비 인헌왕후(조선 제16대 국왕 인조대왕의 어머니)가 있다. 능성 구씨는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의 권력의 핵심에서 가문의 세를 떨치었다.

 

능성 구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54명, 무과 급제자 104명을 배출하였다.[1] 파별로 보면 도원수파 359명, 판안동파 72명, 좌정승파 42명으로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2명, 공신 9명, 부마(駙馬) 3명을 배출하였다. 무과 출신 가운데에서는 영조 때까지 장신급(將臣級: 종2품)이 9명이나 나왔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장신 총수의 12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비율이다.

 

분파[편집]

능성 구씨는 시조 구존유의 7대손에 이르러 판사파(判事派)·전서파(典書派)·시랑파(侍郞派)·좌정승파(左政丞派)·판안동파(判安東派)·도원수파(都元帥派)·재신파(宰臣派)·낭장파(郎將派)·감무파(監務派)·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참판파(參判派)·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의 12개 파로 나뉜다. 이중 후손들이 이북 지역에 살고 있지만 남북 분단으로 전고를 알 수 없는 재신파(宰臣派), 후손이 없어 무후(无后)된 전서파(典書派)와 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의 3개 파를 제외한 9개 파 후손들이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판사공파(判事公派): 파조(派祖) 사재감판사(司宰監判事) 구현좌(具賢佐).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派祖) 공조전서(工曹典書) 구현로(具賢老).

시랑공파(侍郞公派): 파조(派祖) 시랑(侍郞) 구영량(具英良)

좌정승공파(左政丞公派): 파조(派祖) 좌정승(左政丞) 구홍(具鴻)

판안동공파(判安東公派): 파조(派祖) 판안동(判安東) 구성량(具成亮)

도원수공파(都元帥公派): 파조(派祖) 도원수(都元帥) 구성로(具成老)

낭장공파(郎將公派): 파조(派祖) 낭장(郎將) 구현보(具賢輔)

감무공파(監務公派): 파조(派祖) 감무(監務) 구현기(具賢器)

참판공판(參判公派): 파조(派祖) 참판(參判) 구성미(具成美)

문천군사공파(文川郡事公派): 파조(派祖) 문천군사(文川郡事) 구원립(具爰立)

 

 

능성구씨의 시조는 고려 때 벽상삼한삼중대광검교상장군()을 지낸 구존유()로, 신안주씨()의 시조인 주잠()의 사위이다. 주잠은 중국 송()나라의 한림학사()를 지낸 인물로, 1224년(고려 고종 11)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고려로 망명한 8학사의 한 사람이다. 존유도 이때 동행한 것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지만, 중국 사료에는 고려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잠이 능성(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 정착하면서 능성주씨의 시조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존유도 이곳에 정착하여 능성을 관향으로 삼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존유의 아들 민첨()이 평장사()를 지내는 등 후손들이 고려 조정에 계속 출사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6세손에 해당하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 사이에 판사파()·시랑중파()·좌정승파()·판안동파()·도원수파()·낭장파()·감무파()·참판파()·문천군사파() 등의 9파로 갈렸다. 그중 도원수파·판안동파·좌정승파 등 3파가 조선시대에 가장 현달하였으며, 오늘날 구씨 전체 인구의 약 80%(도원수파만 40%)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 세조 때 치관()이 영의정을 지낸 것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상신() 2명, 공신 9명, 부마() 3명을 배출하였다.

《능성구씨사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총 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사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으로 무과 출신이 65%를 차지한다. 이를 파별로 보면 도원수파 359명, 판안동파 72명, 좌정승파 42명으로 역시 이들 3파가 전체의 84%를 차지한다. 무과 출신 가운데 영조 때까지 종2품의 장신급()이 9명이나 배출되었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장신 총수의 12분의 1에 해당한다. 그중에는 병사(使)·수사(使)를 지낸 사직(), 훈련대장 등을 지낸 굉(), 어영대장 인후(垕), 총융사(使) 인기(墍), 어영대장 문치(), 총융사 감(), 훈련대장 성임(), 훈련대장 선복()이 있으며, 굉·인후·인기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에 녹훈되었다.

이밖에 공신으로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현휘()·수영(), 성종 때 좌리공신()에 오른 치관·문신() 등이 있다. 또 고려 말에 좌시중()을 지내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태조가 좌정승을 제수하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은 좌정승파의 분파조 홍(), 중종의 부마가 된 사언(), 인조의 외조부이며 이조판서·좌찬성·숭록공신(祿)에 오른 사맹(), 시문에 뛰어나고 관찰사·참판·대사헌을 지낸 봉령() 등도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3만 7706가구에 12만 50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능성 구씨의 시조인 구존유(具存裕)는 朱子의 후손인 주잠(朱潛)의 사위로서 1224년(고종 11)고려로 망명 해 오면서 함께 동행하게 되어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됐다.

구존유는 생활근거지였던 당시의 지명에 따라 본관을 綾城(능주의 옛 지명) 具씨가 된 것이다.

이후 구씨의 시조 구존유는 고려 말 검교상 장군(檢校上將軍).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정1품)을 지내게 된다.

능성 구씨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를 살펴보면 고려 고종 11년(1224년)인 능성 구씨는 전통적인 무관 가문으로 명문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고려 삼한벽상공신인 시조 구존유를 시작으로, 이성계의 역성 혁명으로 고려가 망하자 이성계의 벼슬하사 회유에도 불구하고 杜門不出로 널리 알려진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두문동 72현 중의 하나인 '구홍(具鴻)'을 비롯해 영의정을 지낸 '구치관',조선시대 충무공 시호를 받은 9명의 무관중 하나인 '구인후' 등 충렬을 빛낸 자랑스런 조상들이 많은 무관 명문가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왕비를 배출한 45가문 중 하나로서 인헌왕후가 능성구씨이며, 좌찬성구사맹의 딸이자 인조의 어머니가 되며, 추존왕 원종 비가 된다.

綾城具家는 본이 하나다. 능성(綾城) 또는 능주(綾州-옛지명)라고도 한다.

그 후 시조 구존유[具存裕]이후 7세손 때에 [판사파:현좌], [시랑중파:영양], [좌정승파:홍], [판안동파:성량], [도원수파:성노], [낭장파:현보], [감무파:현기], [참판파:성미], [문천군사파:원립], 등 9파로 갈리는데, 그중 좌정승파, 판안동파, 도원수파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와 조선의 무관으로서 명문집안이며, 현재는 LG 그룹의 총수가 되어있는 등 재계와 정계, 학계에서도 그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영모제

 

 

 

 

 

능성 구씨의 항렬자에 담겨 있는 의미를 생각하며...

▣ 능성 구씨 항렬표

 

24世 25世 26世 27世 28世 29世 30世 31世 32世 33世
然연○ ○書서 ○會회 ○善선 滋자○ 潤윤○ 本본○ 東동○ ○謨모 ○烋휴 敎교○ 在재○ ○祐우 ○鎬호 齊제○ 源원○ ○林림 ○彬빈
34世 35世 36世 37世 38世 39世 40世 41世 42世 43世
熙희○ 薰훈○ ○奎규 ○培배 鍾종○ 銓전○ ○洙수 ○泓홍 相상○ 秦진○ ○燮섭 ○烈렬 均균○ 康강○ ○鎭진 ○鎰일 泳영○ 浩호○ ○根근 ○杓표
44世 45世 46世 47世 48世 49世 50世 51世 52世 53世
炳병○ 炯형○ ○重중 ○坤곤 庚경○ 鉉현○ ○澤택 ○漢한 樂락○ 榮영○ ○煥환 ○輝휘 起기○ 埈준○ ○鏞용 ○欽흠 承승○ 泰태○ ○集집 ○杰걸

 

우리 능성인(綾城人)들의 이름에 사용하고 있는 항렬자(行列字=돌림자)는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요? 해답은 바로 『능성구씨세보 계축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계축보는 우리 구문이 발행한 역대 족보 중 제4보로서 조선조 철종 4년인 계축년(1853년)에 발행하였습니다. 계축보의 제21권인 『능성구씨도보(綾城具氏圖譜)』의 『항렬계서지도(行列繼序之圖)』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7세에서 처음으로 분파가 되었는데, 각파의 항렬이 같지 않으며 23세까지 그러하다. 때문에 항렬을 쓰지 않고 다만 대수만 써 놓았다. 시조로부터 연(然)자 항렬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항렬을 나란히 써서 소목(조상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는 차례)의 서차를 밝혀 놓아야겠으나 다만 항렬이 일정하지 않아서 능히 다 쓸 수가 없고 또한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 쓸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1세부터 23세까지는 다만 대수만 적고 24세 연(然)자 항렬부터 33세 림(林)자 항렬까지는 동일하기 때문에 비로소 항렬자를 나열하고 대수를 써 넣어서 고징(考徵)에 이바지한다. 이번에 항렬 10자는 은은히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까닭에 삼가 이를 연역(한가지 일로 다른 일을 추론함)하여 그 의의를 밝혀 둔다.

또 우리 구씨가 대성의 종족으로서 이번에 족보를 같이 하고 항렬을 합해 놓았으니, 그 화후(화목하고 돈후함)한 정의와 돈목한 기풍이 더없이 극진하게 되었으니, 이를 준수하여 행하면 우리 종족이 다시 진흥할 것이다. 공자 말씀에 '내 문하의 제자들이 비연(斐然, 문채가 있는 모양)히 문장이 성취했다'고 하였으니, 우리 종중의 선비들이 비연(斐然)히 문장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고로 처음에 연(然)자로 하고, 비연하기를 바라면 독서수신(讀書修身)하는 것만 같은 것이 없는 고로 연(然)자 다음에 서(書)자로 하고, 독서수신한 다음에 가회합례(嘉會合禮, 즐겁게 모이고 예에 합당함)하는 고로 서(書)자 다음에 회(會)자로 하고, 가회합례함으로써 덕을 심는 것이 불어나는(滋) 고로 회(會)자 다음에 자(滋)자로 하고, 덕을 심는 것이 불어나려면 반드시 근본(根本)을 배양해야 하는 고로 자(滋)자 다음에 본(本)자로 하고, 진실로 근본을 배양하려면 오직 성현의 훈모(訓謨)를 바탕으로 해야하는 고로 본(本)자 다음에 모(謨)자로 하고, 성현의 훈모가 어떤 것인가 하면 수도의 교훈(敎訓)이 그것이라 모(謨)자 다음에 교(敎)자로 하고, 신의를 실천하고 공손함을 생각하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으로서 그 효응(效應, 효과와 반응)이 하늘로부터 복(祐)을 받는데 이르는 고로 교(敎)자 다음에 우(祐)자로 하고, 복을 받아 중생들에게 미치게 함은 마땅히 혈구(絜矩, 자로 잼. 즉 사람을 생각하고 살펴서 바른 길로 향하게 하는 도덕상의 규칙)의 가지런함(齊)이 있어야 하는 고로 우(祐)자 다음에 제(齊)자로 하고, 림림총총(林林蔥蔥, 수풀이 우거지듯 많이 모여 서 있는 모양)의 번성함이 실로 일족의 추진력에 기인함이라 고로 제(齊)자 다음에 림(林)자로 하였다.

이것은 가까운데서 먼데로 친족(親族)에서부터 여러 백성(百姓)에게까지 이르는 순서일 것이니, 그런 뒤에야 문중의 운수가 형통하고 하늘에서 복을 받아 세월이 유구할수록 더욱 창성하여 바야흐로 냇물이 흘러내림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비단 오늘의 여러 종인들에게만 축원할 것이 아니라 또한 후세자손들에게까지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우리 여러 종인들은 후손에게 이르기까지 이름자를 생각하고 그 뜻을 새겨 다 같이 지키며 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식(元植) 씀  (출처 / 능성구씨대종회)                            

 

 

 

 

느티나무(도지정보호수, 수령520년)

 

도대문 : 1929년 1월 28일 마을의 대문으로 도둑을 방지하기 위하여 새로 만들었다. 이전에 달았던 도대문은 떼어다 마을에 두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문

 

정동마을은 고려때 능성구씨 구민첨(具민첨)이 평장사를 지냈는데 그의 묘가 이곳에 봉안된 이후 그의 관명을 따라 정승굴이라 하였다가 후에 정승굴이 정동(政洞)으로 간략화 되었다.

정동마을은 북쪽으로 매봉산(188.8m)을 뒷산으로 하는데 이곳에 구민첨의 묘가 있다.
동쪽으로 두루봉(노적봉)이 있으며 큰고랑과 작수굴, 개먹굴이 있으며 서쪽으로 홈거리와 장구배미가 있고 그 너머로 안산과 연주산이 있다. 서북쪽으로는 정동제 저수지가 있으며 그 위로는 민재가 있는데 능주면에 이른다. 남쪽으로는 재를 넘으면 모산리에 이른다.
남쪽방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동에 서북쪽으로 뻗은 골짜기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골짜기 입구에는 구희를 모신 충효각이 있고 마을 입구에는 능성구씨 시조를 모신 영모재와 구존유초혼장지 및 거목이 수그루 있다.
고려때 나씨와 신씨가 현재 나신밑에라고 부르는 집터에서 거주하다가 모두 다른곳으로 이거하였고 후에 다시 창녕조씨가 살다가 이거하였다고 전한다.
1570년경 능성구씨 具善(1550∼1615)이 현 춘양 용곡 통안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하였다.

 

 

 

한천(寒泉) 면 소재지인 한계리(寒溪里) 에서 왼쪽 계곡으로 3㎞쯤 오르면 정리(政里) 라는 마을이 있다.
정승동과 그 입구 마을 결우리(結牛里) 를 합한 행정구역상 이름이다.
이 정리중 정승동은 현재 23호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지만 이조중엽에는 서슬이 퍼렇던 마을이다.
정승동(政丞洞) 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마을 뒷산이 명당으로 정승이 났고 일대가 묘를 섬기기 위한 사폐지(賜牌地) 로 지정됐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능성구씨등이 발복하여 행세를 한 것은 이조 초기로 정조(正祖) 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위세를 떨쳤던 집안이다.
첫 인물이라 할 구치관(具致寬. 1406~ 1470) 은 세조(世祖) 를 도와 세조의 눈에 가시격이었던 김종서(金宗瑞) 를 죽이는데 앞장 서는 등 공을 세워 영의정을 지냈다.
이후 그 가문에서는 5백 62명의 과거급제자를 냈고 이중 65%인 3백 63명이 무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왕후가 1명, 공주를 맞아들인 부마가 4명이나 되었으며 영의정급 2명, 종2품이상을 9명이나 냈다.
지금 정승동에는 구씨 시조 30 ~ 35세손들이 살고 있는데 23호중 20호가 구씨고 나머지 3호는 그 외손들이다.
구씨들은 이 마을입구에 73년 영모제(永慕齊) 라는 제각을 짓고 시조 및 그 후손들 제사를 10월 15일부터 10일간 계속하고 있다.
능성구씨의 전국 분포는 15 만명내외며 선세의 유훈을 받아 지금도 절도 있는 예법으로 제사를 모시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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