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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에 다녀오다/임형신

서강에 다녀오다 / 임형신 소나기재 베고 누워있는 장릉지나 서강에 이르다 물이 불어 오늘 배 못 뜬다네 적소가 보이는 주막거리에 주저앉아 강울음 소리 들으며 술을 마신다 여름의 분탕질은 끝났다 하늘을 찢어버리고 서강에 내려온 원호* 강의 역사 다시 쓰고있다 생을 찢어버리고 온몸으로 길을열고 들어온 김립 강바닥에 시를 널어놓고 몸을 감추었다 물소리 날아다니고 나비가 된 시들이 내려앉는 곳마다 골골이흘러든 사람들 울음토끼처럼 숨어 우는 골짜기 너머 너머 또 너머 다시 분탕질로 얼룩진 강가에 아직도 시는 날아다니고 먼 사람의 길 위에 시는 날아다니고 금표비가 보이는 언덕에 주저앉아 자꾸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는 영월은 너무 멀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서강 가에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 임형신 시인은 전북 정읍에..

2022.09.19

지워진 꽃길/임형신

지워진 꽃길/임형신 꽃무늬 벽지를 사러 지물포에 들렀더니 종이 벽지 대신 두꺼운 갈포벽지를 내놓는다 책상머리에서 막막할 때마다 벽지에 난 꽃길을 바라보다 따라 걷던 상상의 길이 없어졌다 푸른 그늘의 길에서는 편백나무 숲도 길러내던 굵은 마디의 손이 일손을 놓고 여위어간다 촉촉이 물기를 머금었던 방이 마른 꽃잎으로 덮이고 길들은 하나씩 문을 닫는다 지물포에서 살아 숨 쉬던 초배지나 장판지도 이제 인조의 질긴 모노륨에 자리를 내주었다 햇볕 좋은 가을날 풀을 쑤어 아내와 마주 잡고 길을 내던 풋풋한 꽃무늬 벽지의 길은 더 이상 낼 수가 없다 끊긴 꽃길 건너편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내가 있다

2018.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