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채
대문채
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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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광
광채
안채
사랑채
문간채
이 가옥은 1730년(雍正8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으로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고가이며,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순국한 항일지사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선생의 고가이자 괴산 3.1만세시위를 준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또한 근대역사소설의 이정표가 된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의 고택으로도 널리 알려진 문화사적 유산이다.
이 가옥은 명칭과 형식만 고택이지 근자에 복원한 것으로서 원자재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홍명희가 월북작가라 하여 기피인물이었으며, 그의 작품 『임꺽정(林巨正)』은 금서에까지 이르렀었으니, 가옥이 그대로 보존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해금이 되어 독자들 품에서 자유로이 읽혀지고 있지만 말이다.
건물은 중문(中門)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안채, 서쪽에 사랑채를 좌우로 배치하고 사랑채 앞에 행랑채를 두었다.
안채는 ㄷ자형 집으로 중앙에 큰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3칸씩의 방과 부엌을 두고 오른쪽에는 3칸 마루를, 서쪽에는 2칸 툇마루를 두었으며, 앞으로 2칸의 별채가 있는데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一자집으로 동북쪽의 부엌앞에 1칸방을 두고 옆으로 3칸방, 대청, 1칸방을 나란히 배열하고 앞으로 마루를 놓았다.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선생은 사도세자의 비빈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 가문으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사대부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하고 충효의 의리와 절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 익혔다. “부모를 섬기는 데는 효로 하고, 사람을 맞이하는 데는 후덕하게 하며, 성정이 학문을 좋아하여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유교 경전을 읽고 암송하였다”고 전해진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902년에는 내부 주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혜민원 참서관 등의 관직에 있을 때에 일제의 침략과 그에 따른 망국의 진행 상황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였다.
1907년에 태인군수로 발령을 받았을 당시는 태인군 아전들의 탐학이 심했고, 일반 백성들은 의병전쟁과 관련하여 무고하게 잡혀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때에 의병부대를 진압하려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하여 무고한 백성들의 피해를 막고, 군수로 재직하는 동안 백성들을 수탈하지 않고 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에 앞장서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이에 감동한 군민들은 마을마다 송덕비를 세워 그 수가 38개에 이르렀다. 그 중의 하나로 지금도 정주시 산외면 오공리 야정 마을에 <군수 홍범식 선정비>가 남아있다.
1909년 선생은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기었고, 이곳에서도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들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사정하여 주는 등 위민행정(爲民行政)을 펼침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재임 중에 한일병합늑약의 소식을 듣고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탄식하면서 순국을 결심한 듯 미리 유서를 써 놓았다.
8월 29일 드디어 한일병합늑약이 공포되자 저녁에 재판소 서기 김지섭에게 상자를 하나 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는 관아의 객사로 갔다. 이어서 시종하는 고을 사령을 밖에 머물게 하고는 객사 안으로 들어가 북향하여 황제에게 예를 표한 뒤 목을 매어 자결하려 하였다. 이를 알아챈 고을 사령이 통곡하며 만류하자 홈범식 선생은 화를 내며 그를 밀치고 다른 곳으로 재빨리 갔다. 이에 고을 사령이 다시 뒤따라가자 선생은 그에게 모래를 뿌려 앞을 못 보게 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고, 집으로 달려간 김지섭은 선생이 맡긴 상자를 열어 보니, 가족에게 남긴 유서와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그대도 빨리 관직을 떠나 다른 일에 종사하라”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이에 경악한 김지섭은 선생의 행방을 좇고 있다가 때마침 선생을 찾고 있는 고을 사령 일행들과 만나게 되었다. 함께 객사 주변을 나누어 수색하던 중 시신을 발견하였다는 고함에 달려가 보니 선생은 객사 뒤뜰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맨 채로 죽어 있었고 자는 듯 편안한 자세로 발견되었다.
홍범식 선생이 순국할 당시 나이는 막 40세에 들어선 때였다. 선생의 유서 5통은 일본인이 탈취해 갔는데 다행이도 김지섭에게 이미 맡겨 놓은 것은 장남에게 건네져서 유서는 모두 10여 통으로 선생의 조모, 부친과 부인, 여섯 명의 자녀와 장손에게 남겨진 것들이다.
장남에게 남긴 유서는 아래와 같은 당부의 내용이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1910. 8. 29 홍범식 선생이 아들에게 남긴 유서 중에서>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 1888.5.23~1968.3.5)
벽초 홍명희는 장편 역사소설 <임꺽정>을 쓴 소설가이다. 벽초의 생애를 살피면, 한민족의 남북 이질적인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민족의 아픔의 상징일 수 있다. "그는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북한으로 넘어 간 후 남한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1950년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재임할 당시 6·25라는 남북전쟁의 민족상잔이 있었으며, 1968년 북한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 전체의 비극이자 고통스런 역사이며 눈물이요 아픔이다."('벽초 문학비' 중에서)
《임꺽정전(처음에는 <임거정전>)》이란 제목으로 1928년 11월 21일~1939년 3월 11일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1940년 《조광》 10월에도 발표되었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조선시대(명종) 최대의 화적패였던 임꺽정부대의 활동상을 그린 역사소설로서 일제강점기에 쓰여진 방대한 규모의 대하장편역사소설이다. 특히 풍속과 언어에 관심을 크게 불어넣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
홍명희의 3대 가족사
할아버지 홍승목은 조선총독부의 자문역을 맡았으며 이토 희로부미의 자금까지 받은 친일파아버지 홍범식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하여 자결한 순국의 항일지사
홍명희는 충북에서 3.1운동을 처음 주도한 괴산의 큰 항일운동가그러나 월북작가라는 주홍글씨가 붙은 사람참으로 기구한 가족사이다.
우리는 취사선택으로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월북작가 벽초 홍명희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한으로 갔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더구나 그가 북한의 부수상으로 있을 당시에 6.25라는 민족상잔의 남북전쟁까지 일어나대한민국에서는 나라를 배반한 월북작가라는 주홍글씨가 지금까지 따라붙고 있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크게 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에 슬픔이 느껴진다.
남한에서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않은 반면에 북한은 모두 청산하였다. 때문에 돌아오지 않고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반민족친일행위자 청산의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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