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는 사기리 탱자나무 맞은 편에는 영재 이건창 선생의 생가인 명미당이 있다. 이건창 선생(1852∼1898)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로 강직한 성품을 지녀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한다. 15세의 어린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특히 부정한 관리를 처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어 존경 받았던 분이며, 양명학의 지행합일을 내세운 강화학파의 마지막 대학자였다. 저서로는 [당의통략]이 있는데 이는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약 100여년이 넘은 것으로 판단되며 경기도 지방의 전형적인 살림집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주변이 자연석 담장으로 둘러진 ㄱ자형 평면을 가진 중부지방의 민가형태로 안으로 들어가면 명미당(明美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선생의 묘는 양도면 건평리에 소재한다. 건물 바로 옆에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자결한 조부 이시원 선생의 묘가 있다.
명미당(明美堂)은 이건창의 아호이며, 이 집의 호(당호)이기도 하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삶
그의 나이 22세(1874년)때 기록하는 임무를 가진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를 기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청나라의 서보,황각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인정받는다.
1875년 23세의 나이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이 넘게 평안도 벽동에서 귀양살이를 한다.
그의 벼슬길은 늘 당대의 현실적인 상황과 어울리지 못하여 시련을 당하게 된다.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직접 찾아가 도와줄 방법을 찾았다. 1890년 한성부 소윤이 되고 1891년 승지가 되지만 상소가 문제되어 전남 보성에서 유배를 당해야 했다. 벼슬을 단념하였지만 왕은 계속해서 그를 부르곤 하였다.
해주관찰사(1896)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였다. 군산의 고군산군도의 세 번째 귀양살이 후에 고향인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로 귀향한다. 이후 한양에 발길을 끊고 살다가 1898년 그의 나이 47세에 한 많은 삶을 마감한다.
천주교의 정당성과 유교의 허위와 천주교의 교리를 목숨 걸고 썼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쓴 사람은 정하상(丁夏祥1795-1839)이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아들이며 끝내 순교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이론을 겸비하고 실천적 싸움을 최시형 또한 1898년 순교한다.
이건창 선생은 두분처럼 종교적인 진보주의자는 아니었다.
비록 유교주의자였지만 문학적으로 당시의 상항을 표현한 한편의 시가 가슴을 울린다. 이 표현은 문학의 진보이며 그가 얼마나 진실하고 맑은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단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순국의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개성을 6년 사이에 다섯번 지났지만
부소산과 채하동도 들르지 못했네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동안 벼슬살이에
마음에 맞는 일 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이건창 선생의 시는 약 사백 수가 넘는다. 모두 한시들이지만 나라사랑과 민족 사랑이 숨어 있다.
선생의 시는 강화도라는 특수한 지형이 만들어 낸 것인지 모른다.
당시 외세의 침략을 어린 나이에 목도하고 고려 때 몽고침략의 이야기들을 수없이 듣고 자랐을 그에게 나라사랑은 백성 사랑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인 타락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가져온 조선 말기 스러지던 조선의 운명적 상황은 그에게 고통이었으리라. 그는 백성 없이 나라가 없다는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학문적 스승이기도 했던 조부 이시원이 병인양요(1866년)의 수치를 감내하지 못하고 자결하던 장면을 어린 이건창이 목격한 것이 삶을 좌우하였으리라.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은 아우와 함께 양잿물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다.
철종때 그는 이조판서였다.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략하자 주변에서는 그에게 피난을 갈 것을 호소하였지만 관원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는데 무슨 피난이냐며 집에 그냥 머물렀다.
오히려 조상들의 산소에 참배하고 3통의 유서를 남겼다.
1통은 손자 이건창에게, 다른 1통은 가족들에게 마직막 1통은 막내아우에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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