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구둔역(九屯驛)

浮石 2007. 3. 22. 10:45

 

 

 

 

 

 

구둔역 앞 길

 

경기 양평군 지제면 일신리 1337

 

간이역은 늘 거기 그 자리에 있다. 희미한 기적과 함께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온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가 양평 구둔역 플랫폼으로 들어선다.

녹슨 철로가 빙판 갈라지듯 쩡쩡 소리 내어 울고 누렇게 퇴색한 은행잎은 우수수 떨어져 차가운 철로를 뒹군다. 오늘도 타고 내리는 이 드문 적막한 간이역. 기차는 측백나무가 도열한 구둔역을 세월처럼 흐른다.

 

청량리역을 출발한 기차가 남양주 덕소에서 안개 자욱한 한강을 벗하자 비로소 팔당역을 비롯한 추억의 정거장이 하나 둘 차창 밖을 스친다.

북한강철교를 건넌 기차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두물머리를 배경으로 수채화 같은 풍경을 그린다. 터널과 숨바꼭질을 하며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던 기차가 이번에는 막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홀로 허허로운 허수아비를 만나자 반가운 마음에 기적을 울려본다.

타고 내리는 사람 없지만 혹은 정차하고 혹은 스쳐 지나 정차한 곳은 경기도 양평의 구둔역.

구둔역은 최근 문화재청이 건축미가 뛰어나고 서정성이 높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 간이역 12곳 중에서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구둔역이 위치한 양평 지제면 일신리 일대는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길목인데다 문경새재를 넘어 남한강 수로를 타고 한양으로 접근하는 왜적을 방어하기 좋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구둔(九屯)이라는 지명도 임진왜란 때 이곳에 9개의 진지가 구축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앙선 석불역과 매곡역 사이에 위치한 구둔역은 1940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이래 6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겉모습은 예전 그대로다.

지난해 삼각형 모양의 박공지붕만 기와에서 흑갈색 아스팔트 싱글로 교체되었을 뿐 시멘트와 목조로 건축된 역사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네댓 평 넓이의 대합실은 기다림과 설렘의 공간이다.

덜커덩 덜커덩 쇳소리 요란한 청량리행 첫 열차를 타고 경동시장으로 나물 팔러 가던 할머니가 하늘역으로 여행을 떠나고,별빛 헤치고 달려온 막차에서 내리던 여고생 누이도 시집간 지 오래다. 하지만 녹색 페인트로 덧칠한 대합실 나무벤치엔 구둔마을 사람들의 체취가 오롯이 배어 있다.

 

수리봉(400m)과 고래산(542m) 자락에 둘러싸인 구둔역은 아담한 정원이다.

대합실 앞 화분에는 맨드라미 금잔화 베고니아가 꽃을 활짝 피웠고,화단에는 계란 같은 열매를 맺은 화초가지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목화가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2명씩 3교대로 근무하는 6명의 역무원들이 아름다운 마음들을 모아 가꾼 것이란다.

이따금 화물열차와 여객열차가 스쳐 지나갈 뿐 한낮의 간이역은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구둔역 완공 기념으로 심었음직한 수령 70∼80년의 은행나무 한 그루와 곱게 자란 향나무 두 그루가 인상적인 플랫폼은 아직도 흙길인데다 그 흔한 벤치조차 없다.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낮은 시멘트 울타리가 마을 사람들에겐 벤치보다 더 익숙하기 때문이리라.

 

구둔역은 1990년까지만 해도 제법 붐볐다. 주변 산에서 채취한 두릅 등 나물을 서울 경동시장에 팔러가는 노인과 기차 통학하는 학생들,그리고 인근 양평장으로 장보러 가는 주민들로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고 승용차가 늘어나면서 구둔역은 이용객이 현저하게 줄었다.

급기야 10년 전엔 기차역에서 기차표를 팔지 않는 간이역으로 전락했다.

 

구둔마을로 불리는 일신 2리는 주민 300명에 불과한 아담한 농촌마을로,구둔역과 345번 지방도로를 연결하는 시멘트 길은 한낮에도 사람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주변에 관광지가 없다보니 깡통과 냄비를 모자처럼 눌러 쓴 허수아비가 마을 입구를 지키는 구둔마을엔 그 흔한 음식점 하나 없다. 덕분에 무분별한 개발의 칼날로부터 보호된 것이리라.

하지만 철도공사가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 중의 하나인 구둔역도 이제 마침표를 찍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날 운명을 맞았다.

2010년 덕소∼원주 구간 중앙선 복선화 공사가 완료되면 구둔역은 더 이상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면 구둔역의 녹슨 철로는 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추억을 반추하며 쓸쓸한 노인처럼 박해수 시인의 ‘간이역’을 노래하리라.

 

‘내 사랑 버리고/죄 씻는 마음으로/간이역을 떠난다./내 무덤 같은/마음으로 떠난다/풀잎도/어둠도/보이지 않는다/서로 그리워 불러보아도/목 타는 그리운 사람/보이지 않는 사람의 마을/그대의 먼 산/그리운 간이역/찬밥처럼/찬밥처럼/그저 쓸쓸히’

 

양평=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

'서울,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곡역(梅谷驛)  (0) 2007.03.23
양동역(楊東驛)  (0) 2007.03.23
석불역(石佛驛)  (0) 2007.03.21
지평역(地平驛)  (0) 2007.03.21
여주 삼층석탑  (0) 2007.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