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청산면 법화리의 정재수 효자고개

浮石 2008. 10. 26. 08:00

 

 법화리입구의 이정표 

 

 

법화리는 원래 청산현(靑山縣) 북면(北面) 예곡리(藝谷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서, 후에 예곡리에서 법화리로 나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739년 기록이나 1890년 기록에 다 같이 청산현 북면 예곡리라 하여 83호가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청산현의 일부 면을 합하여 청산면으로 만들어 옥천군에 소속시켰다. 이때 예곡리에서 법화리로 나누었다.

법화리라 부르게 된 것은 여러 자연부락을 합하면서 법동(法洞 : 버구실)의 법(法)자와 화동(禾洞 : 숫골)의 화(禾)자를 한자씩 취하여 법화리라 하였다.

자연부락으로는 버구실, 숫골, 양촌 등이 있다.

 효자고개

 효자고개


청산면 법화리(法禾里). 

버구실에서 보은군 마로면(馬老面)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고개(백자미치)가 있다. 이 고개가 "효자고개"이고 고개 정상에는" 정재수 효자비"가 있다. 그후 어린 정재수군의 효행을 길이 교훈삼고자, 그리고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산마루에 '효자 정재수 잠들다'하고 쓴 정재수 효자비를 학생들의 정성으로 세워서 지금도 전하고 있다. 그후부터 이 고개를 '효자고개'라  한다.   지금은 확포장공사가 한창이다.

 

눈보라속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려다 숨졌다 하여 붙여진 ‘효자고개’가 34년만에 확·포장된다.
충북 옥천·보은군은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보은군 마로면 갈전리간 2.1㎞를 내년에 폭 8(2차로)로 확·포장할 계획이라고 21일 밝혔다. 이와 함께 고갯마루(해발 237)에 ‘효자 정재수’의 효행을 기리는 상징물을 세우기로 했다.


정재수(鄭在洙)가 화서면 사산국민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고향은 청산면 법화리이고, 그곳에는 그의 조부모와 큰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재수 어린이는 부모와 함께 상주군 화서면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평소 어린이답지 않게 과묵하고 침착했으며, 예의 바른 어린이였다.


1974년 1월 22일은 구정(음력설)을 하루 앞둔 섣달 그믐이었다. 며칠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연일 계속 내려 쌓였고, 마침내 중부지역에 폭설주의보가 내려있었다. 기온도 영하섭씨 15도에서 20도 사이를 오르내리는 혹한이었다. 이렇게 춥고, 눈이 많이 내리고 쌓이는 날, 정재수 어린이는 자기 아버지를 따라서 고향인 청산면 법화리 할아버지 댁에 설을 쇠기 위하여 길을 나섰다.


상주군 화서면에서 옥천군 청산면을 가자면 보은군 마로면을 거쳐서 효자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 길은 험준한 산 고갯길이어서 차는 탈 수 없었고, 걸어서만 다닐 수 있었다. 정재수군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험한 산길을 혹독한 강추위와 싸워가면서 걷고 있었다.

이윽고, 마로면에 왔을 때는 눈보라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며,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 부자는 어느 술집에 들려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 술집에서 정씨는 꽤 많은 술을 마셨고, 정재수군은 "아버지 빨리가요, 이제 눈이 좀 덜 내리니 이때 가시지요"하며 일어나 가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정씨는 계속 술만 마시고 있었으며 상당히 취해 있었다. 그래서 정재수군은 "아버지 이제 술 그만 잡수세요. 술 취하면 못가요. 술 그만 잡수셔요."하고 몹시 근심스럽게 조르고 있었다.

또 그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눈보라와 추위 속에 어떻게 그 큰 고개를 넘어 가겠느냐고 가지 못하도록 극구 말렸다.

그러나, 술이 많이 취한 정씨는 술기운에 추위도 모르고, 오직 내일이 설날이니 오늘 밤에 꼭 고개를 넘어서 고향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혹한과 눈보라 속을 뚫고, 정재수 부자는 청산을 향하여 길을 떠나고 말았다. 천신만고 길을 잃기 몇 번, 눈이 무릎 위까지 빠지는 산길을 술 취한 아버지를 모시고, 정재수군은 밤이 깊어서야 고갯마루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 정씨는 "이제 더 못 가겠다."하더니 쿡 쓰러지고 마는게 아닌가? 너무 술이 취했고, 눈길도 눈길이지만 밤이 깊어지니 기온이 급강하하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재수군은 "아버지! 아버지!"부르면서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꼬마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술 취해 쓰러진 아버지에게 덮어주고,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아버지도 또 그의 아들 정재수 효자도 함께 동사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 동네 사람들에게 발견된 이들 부자의 시체는 차마 눈뜨고는 못볼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어린 정재수군이 아버지를 죽지 않게 하려고 애쓰다가 자기도 죽게 된 그 상태가 너무도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후 어린 정재수군의 효행을 길이 교훈 삼고자, 그리고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산마루에 '효자 정재수 잠들다'하고 쓴 정재수 효자비를 학생들의 정성으로 세워서 지금도 전하고 있다. 그후부터 이 고개를 '효자고개'라 이름하여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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