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3.1절이면 상예곡 주민들은 그날의 함성과 찌를 듯한 의기를 되새긴다. 자신들의 선조가 청산면내의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아직도 마을 곳곳에는 가신 님들의 채취가 배어 있는 듯하고.
김지수 열사를 비롯한 김철수, 김인수, 최남석 열사는 함께 모여 만세 시위를 하기로 모의하고 조용히 계획을 진행시켜 1919년 음력 3월 2일, 양력 4월 2일에 상예곡의 거의 전 주민을 대상으로 만세시위를 펼치게 된다.
주모자들은 삼방리에 가서 '기'를 만들고 술을 한 잔씩 마신 후 3∼40여 주민들과 함께 교평리 '까죽나무재'(현재의 교평리 상수도 부근)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투석전에 대비, 돌멩이를 한웅큼씩 잡아든 주민들은 마침내 만세시위에 나서 주재소를 둘러싸고 투석전을 벌였다. 왜경의 총칼에 맞설 무기라고는 돌멩이밖에 없었으므로.
시위가 격렬해지자 김철수 열사는 주재소 지붕으로 올라가 건물에 불을 지르려고 하다가 왜경의 칼에 맞아 순국하고 말았다. 이를 본 김인수 열사가 김철수 열사를 업고 나오려다 역시 왜경의 총에 맞아 장렬히 순국했다.
그후 상예곡은 만세시위의 주모자를 찾기 위한 왜경의 감시와 협박 분위기에 숨을 죽여야 했고 숱한 고초를 겪었다. 개가 짖는다 하여 총으로 쏴죽이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불안하게 해 그해 주민들은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고 식량마저 없어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김지수 열사는 왜경의 주모자 색출을 피해 몸을 숨기다 1년여만에 체포되어 태형 90대를 맞았다. 이로 인해 김 열사는 93년 3,1절을 기해 독립유공자로 추존되었다. 이들과 함께 거사를 도모한 최남석 열사는 태형 60으로 형량이 미달되어 독립유공자로 추존되지 못했으나 김지수 열사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던 기운센 장사로 전해져 온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 김주현씨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전해들은 김영기(75) 원로 회장의 증언으로 밝혀진 사실이다.
김영기 회장은 만세시위 당시 순국한 김철수, 김인수 열사의 시신까지도 일견의 탄압으로 가묘 정도로 밖에 모시지 못했다고 증언하는 한편 최남석 열사의 경우 다시 청산면내에서 가장 기골이 장대하고 장사하였다고 들었다고 전해진다. 3,1만세시위 당시 뿐만 아니라 상예곡은 대대로 광산김씨의 집성촌으로 형성되어 왔다. 현재 44가구 1백20여 주민 가운데 타 성씨는 황씨, 설씨, 송씨, 남씨 등 4가구에 불과하다.
상예곡만큼 씨족 중심사회가 그대로 유지되어온 경우가 드물 만큼 순수 씨족사회로 마을이 운영되어 왔다. 예곡리에 광산김씨가 터를 잡게 된 유래는 조선시대 숙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광로 공이 당파싸움에 휘말려 1680년 이후 낙향해 예곡동을 세운 것이 효시였으니 김 공은 당시 영의정이던 우암 송시열 선생과는 이종 친척관계로 지금도 제시리현판인 '예곡정사'를 비롯, 송시열 선생의 친필이 마을에 남아 있다.
1951년 예곡리에는 지난해까지도 본교였던 청산초교 예곡분교장이 자리잡아 예곡, 법화, 삼방, 명티 마을의 인재 양성고로 충분한 역할을 해왔던 것 이외에 보건진료소, 농협창고, 청산성당 예곡공소 등이 존재해 이 부근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을 앞산인 매봉재에서 내려다 보면 상예곡은 영락없이 호랑이가 마을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며 산세가 끝나는 지점에 바위가 위치해 있는데 이를 백호바위라 부른다.
한때 이곳에 연못을 조성했다가 마을에 좋지 않은 일들이 연달았다는데 한차례의 홍수가 지난 후 연못이 묻히고 부터서야 진정되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주민들의 주요소득원은 인삼으로 44가구 중 20여 가구가 이를 경작하고 있는데 최근 2∼3년 사이에 포도재배농가가 새로 생겼다. 93년의 경우 산골 다랭이논이 많은 상예곡은 냉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는데도 제대로 보상이 안돼 주민들의 불만거리가 되고 있다.
아직까지 소류지 하나 없는 천수답이 상예곡의 현실로 개설이 마을주민의 숙원이지만 4천여평에 달하는 마을 공동농장이 있다는 사실은 주민들이 긍지로 여기기에 충분한 사안이다. 하천부지를 주민들의 공동노력으로 경작지를 만들었던 것은 물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마을의 잡부금은 다 해결하고 있을 정도로 단합된 힘을 과시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현재 해군 진해 정비창장인 김용성 준장을 비롯, 김용두(창원대)씨, 김용철(총무처)씨, 김성수((주)쌍용 총무부장)씨, 김성중(국사편찬위원회)씨, 김동수(기상청)씨, 김인중(군건설과)씨 등의 출향인과 함께 김두현씨, 김찬중씨, 김세준씨, 김영중씨, 김영희씨, 김근중씨 등의 교육공무원, 김용시씨, 김용귀씨 등의 경찰공무원이 있다. 청산 3,1만세 시위의 발원지인 상예곡. 이제 점차 흐려져가는 공동체 의식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이 기대되는 시점이다.
이조 숙종 6년(경신년 1680년) 광산김씨 김광노 선생께서(충의위) 영의정 우암 송시열 선생의 추천으로 현 상예곡에 자리잡다.
앞산 뫼봉재에서 보면 호랑이가 마을을 앉고있는 모습이고 마을 끝 백호가 있다(바위). 세기 초창기에 어느 스님이 부락민이 시주에 인색하자. 백호에 연못을 파면 부귀 영화가 온다하여 연못을 파니 농사가 안되고 부락에 재앙이 이어졌다.
후에 연못이 자연히 묻히면서 다시 부락이 활기를 다시 찾고 부하게 되었다. 현재도 백호에는 300여년이된 버드나무, 느티나무 등이 있고 옛날 조성했던 놀이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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