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량폭포(玉樑瀑布)
입석 1리 옥양동의 석문사 깊은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구름다리사이로 무지개빛 옥수를 토해내니 옥량폭포이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옥량동의 계곡에 있다. 백악산이 길게 뻗은 줄기의 북면(北面)이다. 이 쪽은 남면인 용화쪽의 유순(柔順)과는 대조적으로 암만이 험준하고 인상이 강직하다.
이러한 산세에 따라 계류 또한 굴곡(屈曲)과 영진(盈進)이 무상(無常)하여 격탄(激灘)과 청간(淸澗)과 청담(澄潭)이 연속되었다가 마침내 조화의 극치인 이 옥량과 폭포가 이루어졌다.
옥량은 길이 약 20m, 넓이 2m, 암석이 대들보와 같이 또는 교량과 같이 폭포위에 걸쳐져 있는 천상작품이다. 처음은 둥글고 가늘다가 갈수록 모나고 넓고 커졌다. 무엇이라 어떻게 표현이 어렵다.
아무튼 밑으로 물이 흐르니 하나의 돌다리다. 그러나 다시 보면 백포(白布)와 같이 폭포를 매어 단 대들보이다. 자세히 보면 조화의 공법은 시종과 표리가 분명하고 또 완전하며 귀중한 것을 감추는 배려도 있었다.
그냥 하나의 돌을 걸쳐 놓은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전후(前後), 방원(方圓), 후박(厚薄) 모두 다 있고 조금도 부러지거나 흔들릴 염려가 없는데도 가운데에 큰 바위로 고임돌을 세워 안전을 다하였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 가려면 약간 비탈져서 조심이 없이는 어렵다. 기어가거나 타고 가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 그런가 하면 다리에서 보면 위에서 오는 물은 큰 바위를 늘여 세워 가리고 밑으로 흐르는 물은 단애로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비경을 만든 것이다.
비록 국(局)은 적으나 별건곤(別乾坤)이다. 폭포는 옥량위의 바위밑에 청담(淸潭)을 만들어 많은 물을 모아서 한숨 쉬고는 넓은 암반에 다 넓게 펴서 잔잔히 비늘지어 살며시 옥량밑으로 내리다가 그대로 10여장을 떨어진다.
억겁을 떨어지고 또 떨어져 바위가 닳고 뚫어져 구멍이 나고 골이 지고 웅덩이가 되었다. 모두가 다 흰돌이고 그 사이를 물이 흐른다. 넓직 넓직한 반석이 깔리고 굵직굵직한 바위가 널려 있다.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서고 틈에는 철쭉이 꽃을 피운다.
조그만한 모래사장이 생기고 어김없이 갈대가 나고 땅버들이 났다. 그리하여 천여 객이 함께 와도 쉴 그늘이 있고 앉을 반석이 있고 목욕할 웅덩이가 있다. 또 몇날을 보아도 못다 볼 경관이 있다.
오리의 계곡이 굽이마다 풍경을 새롭게 하고 돌마다 바위마다 모두가 특색이 있다. 화초가 있어 향취가 있고 수림이 있어 바람 소리 상쾌하다. 층을 지어 대가 되고 높이 솟아 누각이 되고 넓직이 펼쳐서 정자가 되었다. 이 모두가 천작이다. 속세의 풍물은 원래가 아니다.
지척에 상주와 청주를 연락하는 포장도로(국가지원지방도 32호선)가 있다.
폭포 옆에 작은 굴이 있다. 겨우 한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 내부에는 바위가 엉켜있고 어두워서 자세히 관찰할 수 없으나 기괴한 형상들이 널려있어 흥미롭고 나오는 곳은 한층 위이다.
어찌보면 지상과 지하의 대조를 위한 것 같고 아니면 위에 있는 보굴의 시작품인 것 같다. 계곡 상류의 중복(中腹)에 거대한 층암이 마치 지붕과 같이 생겨 있고 그 안에 굴이 있다. 이름하여 보굴(寶窟)이다.
굴안에 미륵불상이 있고 그 뒤에 가파른 층벽을 나무를 휘어잡고 올라가서 왼쪽으로 들어가는데 깜깜하게 어둡고 암벽사이의 통로도 좁아서 몸이 조금 큰 사람은 나갈 수 없다.
30m쯤 들어가면 뒷굴이 나온다. 이 굴은 방 하나와 부엌 하나가 될만한 크기이다.
다시 위로 오르면 밖으로 나와서 산등으로 오르게 된다. 이 보굴에는 정감이 넘치는 전설이 전해 온다.
세조의 공주와 김종서의 손자가 원수의 자손인줄 서로 모르고 이 굴속으로 피신하여 앞과 뒤의 굴에서 각기 살다가 결혼하기에 이르니 결국 원수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굴이므로 보굴중의 보굴이다.
근래까지 굴 앞에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정화(淨化)되고 자연의 동굴과 정화(情話)만이 남아 있다가 근래에 석문사(釋門寺) 불사가 진행 중이다.
동네의 맞은 편 의상동에 큰 저수지가 있고 못 밑에 작은 암자가 있어 이곳의 관광에 한 몫을 더하고 있다.
옥량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