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영주 무섬마을

浮石 2013. 8. 30. 07:06

 

무섬마을은 2013년 8월 22일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문화재 제278호로 지정되었다.

무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반남박씨(潘南朴氏) 입향조인 박수(朴수; 1642~1729)가 이 마을에 들어와 만죽재(晩竹齎)를 건립하고 터전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무섬의 서편 건너 마을인 머럼(원암:遠岩)에 거주하던 박수가 현종 7년(1666)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후, 그의 증손서(曾孫壻:증손녀의 남편)인 선성김씨(宣城金氏 : 예안김씨(禮安金氏)라고도 함) 김대(金臺 ; 1732~1809)가 영조 33년(1757)에 처가 마을인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두 집안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구한말(舊韓末)에는 120여가구에 주민 500명이 살았을 만큼 번성했지만,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주민들의 이농이 줄면서 마을의 규모가 점차 줄어 한때는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시행한 ‘영남 북부 유교문화권사업 정책’으로 전통마을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해우당고택(海愚堂古宅)

해우당(海愚堂)

 

해우당 고택(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

 

선성(宣城) 김씨 입향조 김대(金臺의 셋째집 손자 영각(永珏 : 1809 ~ 1876)이 1830년에 건립하였고, 고종 16년(1879)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1825∼1900) 선생이 지은 집이다. ㅁ자형 구조를 보이는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 가옥으로 앞면의 대문을 중심으로 하여 옆에 큰사랑과 아래사랑을 두었다. 특히 오른쪽의 큰사랑은 지반을 높게 하여 원기둥에 난간을 돌려 누마루를 꾸몄다. 앞면 5칸의 안채와 양 옆에 부엌과 창고방을 두고 있어 조선 후기 ㅁ자형 가옥의 평면구조를 잘 갖추고 있는 집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해우당의 편액(扁額)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만운고택에서 장남인 김호규와 집을 두 채를 지어 살았는데 큰 홍수로 인해 김성규(조지훈의 장인)가옥이 유실되어 이곳에 새로지었다한다.

김한직 가옥

 

옛 선조들의 당시 생활상을 통해 잊혀가는 수준 높은 전통문화를 직접 느껴 볼 수 있는 김한직 가옥은 자연과 전통이 어우러져 단아한 격식이 느껴지는 곳이다.
낮은 담장에 꽃과 풀이 어우러진 멋스러운 기와집으로 저잣거리에서 막걸리도 한 사발 들이켠 뒤 이곳 대청마루에 앉아 오순도순 담소를 나눠도 운치 있다.

또한 농촌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작패기 체험을 할 수 있으며, 그 장작으로 군불을 때기도 하고 고구마나 감자를 구워먹기도 한다.
홀로 묵는 것보다는 온 가족이 함께 어우러지면 더욱 좋다.

 

 

김뢰진 가옥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처가댁이라고 알려진 김뢰진 가옥은 19세기 초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경북민속자료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성김씨 김뢰진가옥은 만운고택으로 잘 알려진 가옥이다. 선성김씨 무섬 입향시조인 김대의 손자 김영형은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3남인 김낙진의 아들이 김휘걸이다. 만운(晩雲)은 김휘걸의 호이다. 김휘걸은 1885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수성가하여 부농을 이루었다. 그는 7남매를 두었는데, 집이 좁아 1900년대에 현재의 사랑채와 대문채를 신축하였다. 대문채는 무섬마을에서 가장 큰 5칸 규모의 큰 대문채였으나 1934년 홍수로 쓰러진 것을 지금의 규모로 재건했다.
김휘걸은 대문채를 2남인 김성규에게 분가하여 한울타리 안에서 4대가 동거하였다. 김성규는 중동중학교를 4년 다니다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처분을 받고, 영주로 낙향하였다. 영주에서 신간회 영주지회 회원과 영주청년동맹의 집행위원을 겸임하다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성규는 출옥 후 족실인 김화진과 더불어 무섬마을에 아도서숙을 세워 교육에도 크게 기여했다. 김성규는 후에 시인 동탁 조지훈의 장인이 되었다.
조지훈은 처가인 무섬마을에 전승되던 고기잡이 방법인 ‘겨맥이’를 소재로 시를 짓기도 했다. 특히 「별리」는 조지훈이 한때 무섬마을 김뢰진가옥에 머물다 떠나면서 지은 시로 매우 뜻 깊은 시이다.

 

 

별리(別離 )

 

           - 조지훈 -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직이 흰 구름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저고리 다홍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려가고
방울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메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을 바라보니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고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삼고 가옵신 님아

 

한옥과 초가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선성 김 씨들이 살던 가옥으로, 후손 대대로 살면서 수리를 거치다보니 겉모습은 변화되었지만 내부는 원형을 잘 갖추고 있다.
현재 안채는 초가 까치구멍집이고 사랑채는 기와집으로 되어 있었는데, 당초 사랑채도 초가로 된 까치구멍 집이었으나, 1975년경 지붕 개량 때 기와를 얹었다고 전한다.
이 가옥의 특이한 것은 집 내부에 마구간이 있다는 점으로, 과거 재산 목록 1호였던 말이나 소를 기르던 곳이 부엌 옆에 자리하고 있다.

 

만죽재 고택 : 경북민속자료 제93호

 

반남 박 씨의 종가로 300년의 세월을 담은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이다.
현 소유자의 11대조인 박수(1641∼1699) 선생이 이 마을에 정착하여 지은 집으로, 안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ㅁ자형의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사랑채만 독립된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맞배지붕이다.
대부분의 옛 가옥들이 가지는 기존의 형태와 달리 왼쪽에 독립된 사랑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박수의 선친인 환학암(喚鶴庵) 박경안(朴景顔)은 강 건너 머름마을에서 오랫동안 세거해 왔는데 무섬의 현 위치 반남박씨 만죽재고택에 처음으로 터전을 마련하고 가옥을 건축하여 차자인 박수에게 물려주었으므로 박수는 무섬마을의 입향조가 되었다. 만죽재 수리시 “康熙 五年 丙午 八月 十九日 平人 金宗一 造作(강희 5년 병오 8월 19일 평인 김종일 조작)”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어 지금의 만죽재 건물이 1666년(헌종 7)에 건립된 것이 확인되었다.
입향 당시부터 무섬은 섬계(剡溪)로 불려, 섬계초당(剡溪草堂)이라는 당호가 만죽재에 있었다는 구전이 있다. 박수는 현재의 주손인 박천세(朴天世)의 12대조이다. 박천세의 6대조 박제익은 섬계(剡溪)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현재의 당호인 만죽재는 박천세의 4대조 박승훈(朴勝勳)의 아호를 당호로 삼은 것이며, ‘만죽재’ 편액은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1856~1932)의 필적이다.
만죽재 박승훈은 조야의 선비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유고집으로 『만죽재 일고』가 전한다. 박수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박창은(朴昌殷, 1669~1742)이 선성김씨 김윤일(金允一)의 딸과 혼인하고, 딸도 선성김씨 김범석(金範錫)에게 출가하였다. 또한 박수의 증손서(曾孫壻)가 된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대(金臺)는 영조 말엽에 무섬에 들어와 선성김씨의 입향조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양성이 함께 이곳에서 세거하고 있다. 
 

 

무섬마을의 전통 기와가옥은 ‘ㅁ’자형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를 띤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이 사방을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어 대문 밖에서는 집안의 생활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무섬마을 전통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고, 안채를 사랑채보다 높게 지어 햇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게 하는 것이 특징인데, 유교적 격식을 엄격하게 거주환경에도 적용한 결과이다.

안채와 달리 사랑채는 밖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무섬마을 전통가옥들은 그 집 주인의 신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사랑채의 기둥을 차별화하였는데, 같은 양반이라도 벼슬한 사람이 거처하는 집의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벼슬을 못한 사람은 각진 기둥을 세웠다.
집주인의 신분에 따라 사랑채 모양을 달리한 무섬마을의 고가(古家)는 대부분 서남향이다.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산맥의 정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기 위해 가옥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박종우 가옥 (오헌 고택)

 

전통가옥은 자연과 닮게 지어졌다.
산자락에 의지해 지으면서 결코 산을 깎지 않는다.

사랑채, 안채, 대청마루에 마당까지 갖춘 고색창연한 전통가옥 옆으로 골목을 이룬 돌담들이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박종우 가옥이다.

너른 마당은 뛰놀기 좋고, 마루에 앉아 그런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어 대가족이 함께 오기 좋은 곳으로 최대 20명까지 수용가능하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초가지붕 위의 박, 아이들에게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로 더 잘 알려진 박을 직접 볼 수 있다.
소소한 풍경들이 정겹기만 하다.

김광옥가옥

 

배산임수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무섬마을. 그 중에서도 김광옥 가옥은 예안김씨 입향조인 김대(1732~1809) 선생의 집으로 베스트셀러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의 저자 전우익 선생의 외갓집이기도 하다.
이곳은 아름다운 꽃밭과 싱그러운 수목이 어우러진 넓은 마당,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깔끔한 방과 욕실, 무엇보다 즐거운 여행에 한 자락을 더할 계절별 체험 거리들이 준비되어 있다.
특히 여름에는 청정 무섬마을에서 나고 자란 유기농 채소를 맛볼 수 있으며 겨울에는 아궁이 체험과 뜨끈한 아랫목에서 즐기는 군고구마가 일품이다.
김광옥 가옥에서 온가족이 함께 인생의 추억 한 페이지를 장식해보자.

김정규가옥

1999년 8월 9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62호로 지정

 

1920년대에 건립되었으며, 담장 없이 남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까치구멍집으로,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고 자연석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상부구조는 5량가이며, 지붕은 원래 초가로 되어 있었으나 1976년에 개량할 때 기와를 얹었다. 이때 외형이 약간 바뀌었지만 내부 시설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평면은 어간(御間)의 봉당과 2.5칸 규모의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랑방과 건넌방, 오른쪽에는 정지(부엌)와 안방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정지의 부뚜막 위에는 안방에서 이용하는 반침이 설치되어 있고, 마구간 위에는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이 가옥은 일반적인 9칸 까치구멍집과는 달리 평면상 몇 가지 변형이 있다. 먼저 마구간이 있어야 할 전면 왼쪽칸에 사랑방을 두고 사랑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내어 폐쇄적인 까치구멍집에 개방성을 도입하였다. 마구간은 정지 앞쪽의 좁은 공간에 두었다. 또한 안방이 2칸, 마루가 2.5칸이고 사랑방 뒤에는 벽장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평면구성은 6칸 까치구멍집이 생활의 편의에 따라 확장되어가는 형태로, 강원도 남부지역의 두리집과 같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김정규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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