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앞의 상가 자리가 예전엔 막걸리와 함께 도토리묵과 파전등 부침개 가게들이 즐비하던 곳이다.
80년대 중,후반 쯤 왔다가... 이십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도봉산 입구 풍경.
만장봉 조형물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부안 출신의 기생 매창
매창은 1573년(선조 6) 부안현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났다. [매창집(梅窓集)]의 발문을 보면, 그녀의 출생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조선 중기 때의 여류시인 · 명기(名妓). 자는 천향(天香), 아명은 향금(香今), 호는 매창(梅窓) · 계생(柱生) · 계량(桂良).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가사(歌詞) · 한시(漢詩) · 시조(詩調) · 가무(歌舞) · 현금(玄琴) 등에 뛰어난 여류 예술인이었다. 유저(遺著)에 《매창집(梅窓集)》이 있으며, 그가 정을 주던 학자 유희경(劉希慶)과 이별하면서 지은 시조가 《청구영언(青丘永言)》 등에 실려있고, 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도 시조 10수가 전한다. 그의 시조 2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은 다 자는 밤에 내 어이 홀로 새 야, 옥장(玉帳) 깊푼 곳에 자는 님 생각 난고,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이화우(梨花雨) 흣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과 유희경, 그 만남과 사랑
매창에게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무렵이었다. 그런데 그가 사랑했던 남자는 스물여덟 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천민 출신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이었다. 뭇 양반들의 사랑을 받으며 명성이 높았던 매창이 신분이 높지 않았던 유희경에게 강하게 끌렸던 것은 천민 출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점과 둘 다 시에 능해, 시로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인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으며,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했다. 여기에는 천민 출신 시인 백대붕(白大鵬)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유희경과 백대붕은 함께 시를 잘 짓기로 소문이 퍼져 ‘유백(劉白)’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매창도 이들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 대체적으로 학계에서는 1591년(19살)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1586년(14살)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김준형, [이매창 평전], 한겨레출판, 2012, 94쪽.)
젊은 시절 부안을 지날 때였다. 이름난 기생 계생이, 유희경이 서울의 시객(詩客)이라는 말을 듣고 물었다. “유희경과 백대붕(白大鵬) 가운데 누구신지요?” 대개 그와 백대붕의 이름이 먼 지역까지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다가 이에 이르러 파계를 했다. 시로 풍류로써 통했기 때문이다. 계생 역시 시를 잘 지었는데, [매창집]이 간행되었다. 유희경, [촌은집], <행록(남학명 찬)>
위의 글은 남학명(南鶴鳴)의 [행록(行錄)] 중 일부로, 유희경과 매창의 만남을 보여준다. 남도를 여행하던 유희경은 매창을 찾아온다. 유희경은 그때까지 뭇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매창에게는 큰 관심을 보였다. 매창이 이미 유희경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유희경 또한 명성이 자자한 매창에 대해 알고 있었음은 그녀에게 지어준 시 <계랑에게[贈癸娘]>를 보면 알 수 있다.
남쪽 지방 계랑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
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에까지 울리더군
오늘 그 진면목을 보고 나니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유희경, [촌은집], 권 1, <증계랑(贈癸娘)>
이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매창은 시를 짓고 노래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희경은 부안으로 내려와 직접 매창을 보고 나서, 그 소문이 떠도는 소문만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매창의 매력에 흠뻑 빠져, 마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다고 표현했다. 시에 능통했던 유희경과 매창.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감정을 시를 통해 주고받았다. 유희경의 문집에 실려 있는 시들 중에 매창을 생각하며 지은 시는 7편으로 확인된다.
유희경은 28세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매창을 연인처럼 무척이나 사랑했던 듯하다. 매창이 삐쳐서인지 얼굴을 찡그렸을 때, 자신에게 선약(仙藥) 하나가 있어 고운 얼굴의 찡그린 흔적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것을 주고 싶다고 하였다. 찡그린 모습까지도 귀여워하며, 그녀를 달래주고자 하는 유희경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유희경은 창덕궁 옆을 흐르는 계곡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이곳을 침류대(枕流臺)라 하였다. 당시 침류대에는 이수광ㆍ신흠ㆍ허균ㆍ유몽인 등 당대의 명사들이 모여들었으며, 유희경은 침류대의 주인으로 자처하였다. 유희경에 대해 허균은 “사람됨이 청수(淸秀)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다.”고 평했으며, 조우인(曺友仁)은 “당시 사대부들조차 예법에 관한 한, (유희경을) 따라잡을 자가 드물었다”고 할 만큼 유희경은 예법에 아주 밝았던 인물이었다.
부안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지만, 이별 후에도 두 사람은 사랑을 잊지 못하고 서로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만나지 못하면 못할수록, 그리움은 더욱 커지는 걸까? 유희경은 서울에 있어 부안에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읊었다.
“그대의 집은 낭주에 있고/ 내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볼 수 없으니/ 오동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도 애가 끊어지누나”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문득 매창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기도 했다. 유희경이 매창을 그리워했듯이 매창 또한 유희경을 그리워했다. 맨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매창이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하고 읊은 시조는 바로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이 글은 1876년 박효관과 안민영이 편찬한 [가곡원류(歌曲源流)]에 실려 있는데, 시조 아래 주석에 “촌은이 서울로 돌아간 뒤 소식이 없었다. 이에 이 노래를 지어 수절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임을 알 수 있다.
- 유희경, [촌은집], 권 1, <회계랑(懷癸娘)>
- 유희경, [촌은집], 권 1, <도중억계랑(途中憶癸娘)>
두 사람은 첫 만남이 있은 지 15년이 지나 다시 만났지만, 너무 짧은 재회의 시간이었다. 함께 시를 논했던 유희경은 다시 서울로 돌아갔고, 이것은 이들에게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매창이 3년 뒤인 1610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희경은 “정미(丁未: 1607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하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름난 기생 매창과 천민 출신의 유희경. 두 연인은 신분과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다. 만남은 짧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 품은 사랑은 시를 통해 평생을 이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시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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