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강화 초지진(草芝鎭)

浮石 2015. 2. 17. 07:00

 

사적 제225호. 1716년(숙종 42) 강화 해안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적지이기도 하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강화부지(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에 설치되었으며, 1726년(영조 2)에 진장(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군관(軍官) 11인, 사병 98인, 돈군(墩軍) 18인, 목자(牧子) 210인을 배치했고, 진선(鎭船) 3척을 두었다. 초지돈(草芝墩)·장자평돈(長者坪墩)·섬암돈(蟾巖墩)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이 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軍器庫)·화약고·진사(鎭舍) 등 군사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모조리 파괴되었다.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 문의 대포 역시 그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강화해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 1875년 8월 21일, 운요호가 강화도 동남방인 난지도(蘭芝島) 부근에 정박, 단정(短艇)을 내려 담수(淡水)를 찾는다는 구실로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요호는 110㎜와 40㎜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 때 초지진에는 사정거리 700m의 2인치 정도의 대완구만 있었다.

그 뒤 초지진은 폐쇄되어, 시설은 모두 허물어지고 돈(墩)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砲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다. 그 외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砲閣) 안에 전시되어 있다.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다.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포구

대명리 포구

 

김포시 대곶면 대명리

김포 함상공원 : 김포 함상공원은 52년 바다를 지켜오다 2006년 12월 퇴역한 상륙함을 활용하여 조성한 수도권 유일의 함상공원이다.

초지대교(草芝大橋)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간을 잇는 해상교량이다. 개통 초기에는 강화대교의 교통량을 분담하는 기능 등의 이유로 제2강화대교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정식 명칭인 강화초지대교는 조선 시대의 군사시설인 초지진(草芝鎭)에서 따 왔다.


길이 1.2㎞, 폭 17.6m의 왕복 4차로 교량으로, 인도자전거도로도 같이 개설되었다. 다리 아래로 선박이 통행하기 위해 다리 가운데가 끝보다 높은 형태이다.


기존 강화군 동북부와 김포시 서북부를 잇는 다리인 강화대교(48번 국도)의 교통량 포화에 따른 대체 목적으로 부가로 설치되었다. 강화읍으로 직결되는 강화대교와는 달리 강화도 동남부 길상면으로 직결된다.


1995년 민자유치 사업으로 착공되었다. 1999년 인천광역시가 발주자로 감독하게 되었고 2002년 8월 공식 개통하였다.

주변 관광지로는, 초지대교 동쪽에 대명항이라는 항구가 있다. 그리고 강화도 남부의 마니산, 전등사, 초지진, 덕진진 등이 있다.

초지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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