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12호
감은사지석탑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세워지는 모든 삼층석탑의 시원(始原)이 되는 석탑이다. 석탑은 미륵사지석탑에서 본 바와 같이 백제에서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재료가 석재일 뿐 전체적으로 목탑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목조 구조를 단순화시킨 석탑 양식은 감은사지석탑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이 성립된 시기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시점이라는 점은 또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지대석과 기단부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동탑의 경우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서탑의 경우 탑 주변으로 인도 스투파의 베티카에 해당하는 일정한 너비의 탑구(塔區)가 마련되어 있다. 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탑을 돌 수 있으며 그 자체가 탑을 예배하는 탑돌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목탑의 경우 기단 상부에 일정한 공간이 있어 그곳을 통하여 탑돌이가 가능하나 석탑의 경우에는 기단 위로 올라갈 수 없으므로 이러한 구조가 탄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서탑
감은사는 682년(신라 신문왕 2)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의 건립도 그 무렵으로 추정되어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1960년에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에 넣어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동탑
동탑
두 기의 탑은 전체적인 결구 방식과 쓰여진 석재의 수가 동일하지만 크기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즉 서탑에 비해 동탑의 각 부재가 조금씩 크다. 그 결과 양 탑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동탑이 더욱 괴체적(塊體的)이고 장중한 느낌이 든다. 1959년과 1996년 서탑과 동탑이 각각 해체·복원되는 과정에서 신라 금속공예의 정수인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 다량의 공예품을 통하여 감은사지석탑이 당시 신라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인정받는 뛰어난 예술품이라는 점과 함께 국제적 우수성과 독창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이는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위대한 시대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된 명작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감은사는 원래 바다로 침입해 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문무왕이 지은 절인데, 절을 짓기 시작한지 1년 만에 왕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부왕의 큰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은 것이‘감은사’이다.
문무왕은 죽어서 용으로 변해 신라를 지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감은사지 금당 터에는, 신문왕이 절을 지을 때 죽으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선왕의 유언에 따라 금당 구들장 초석 한쪽에 용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절터에는 신라시대 석탑 가운데 가장 큰 삼층석탑 두 기와 금당과 강당, 회랑을 둘렀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웅장하고 기품 있는 석탑은 물론이고 가람의 배치도 군더더기 없이 정연하다.
문무왕과 신라인의 호국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난 듯 삼층석탑은 굳건하고 장대한 풍모다. 탑의 상륜부에는 높이 약 3.9m되는 찰주가 꽂혀있다.
찰주는 탑의 상륜부를 장식하는 석재들을 꽂기 위해 세운 쇠기둥인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부식되므로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한편, 1959년 발굴 조사 때에는 서쪽 탑에서 화려하고 섬세한 청동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황룡사’, ‘사천왕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호국 사찰 가운데 하나이며, ‘문무왕릉’, ‘이견대’ 와 더불어 신라인들의 호국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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