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은 광무1년(1897) 총세무사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꾸며진 현대식 공원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시내 청년학도와 애국시민이 이곳 파고다 공원에 모여 학생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에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기미독립선언서 기념비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이 당시 일제 강점 하에 있던 조선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한 글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션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모든 행사가 끝난 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다.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저녁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당에 도착하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 기미독립선언서 처음 부분 - |
팔각정
이 건물은 건물 내부의 고주와 바깥쪽의 평주로 내외진을 형성하며 기둥열이 구성되어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외진 한변의 길이는 12자이다. 외진을 이루는 평주의 높이는 11자이고, 내진을 이루는 고주의 높이는 14자이다. 평주 상부에는 몰익공(勿翼工)에 운공(雲工)이 부가되었고, 겹처마의 팔각지붕으로, 지붕 꼭대기에는 2단의 절병통을 설치하였고, 사래 끝에는 토수를 꽂아 마무리했다. 평주와 고주 사이에는 툇보를 걸어 추녀방향으로 기둥 외측에 익공이 설치되었으며, 내부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었고, 고주 상부에서 대들보의 머리가 내밀었는데 좌우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 밑에 네 방향으로 익공을 설치하였다. 대들보와 직각방향으로도 단면이 작은 부재로 보를 걸었고, 그 상부에 동자주를 세우고 상중도리를 얹었으며, 고주와 상중도리 사이에는 각서까래를 사용하여 부채꼴 모양의 지붕을 구성하였다. 지붕의 중앙부는 중심에서 십자로 충량을 걸어 중심부를 관통하는 찰주를 받도록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을 둘러가며 장대석으로 다섯 단의 층단식 기단으로 처리하였고 내부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이며, 외진주열에는 각 면에 낙양을 설치하고 무궁화 당초로 장식하였으며, 머리초 사이의 계풍에는 소나무ㆍ난초ㆍ국화 등의 그림으로 장식하여 일반적인 단청과는 달리 한국적인 정서가 강조된 문양들로 시대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이 건물은 외관상의 비례가 훌륭하여 남산 팔각정의 모본(模本)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 때 영국인 브라운이 탑골공원을 조성할 때 함께 건립하였다. 1902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위하여 군악대의 연주 장소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곳은 황실 관현악단이 황실 음악 연주소로 사용하였는데, 일요일에만 공개로 관현악을 연주하였다. 음악을 듣기 위하여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자, 1913년 7월부터 평일에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건물은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의 큰 기둥인 고주(高柱)와 바깥쪽의 평주로 내외진을 형성하며 기둥열을 구성하고 있다. 지붕은 팔각지붕이며 겹처마로 되어 있다. 기단은 각 면을 둘러가며 장대석으로 5단의 층단식(層檀式)으로 쌓았다. 내부 바닥에는 박석을 깔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을 칠하였다. 건물 외관의 비례가 뛰어나 뒤에 건립한 남산 팔각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학생들과 시민이 이 누정 앞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벌였던 곳이다. 1989년 9월 11일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되었으며 종로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원각사지10층석탑 국보 제2호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현재는 부식 방지를 위해 유리벽으로 보호되어 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사적 제354호로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에 의해 공원으로 조성되어 1920년에 공원으로 개원하였다. 1919년 3. 1 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우리민족의 독립 정신이 살아 숨쉬는 유서깊은 곳이다. 1992년 5월 28일 공원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시설로는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 운동 기념탑, 3.1 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 유래
탑골 공원은 고종 때 원각사 터에 조성한 최초의 공원이다. 탑골이라고 불린 것은 최근의 일이고 이전에는 탑이 있는 공원이라고 해서 영어식 발음으로 파고다라고 했다. 일제에 대한 최대 규모의 민족 저항운동이었던 3·1 운동이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보지정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는 것으로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며,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수법이 세련되고 화려해 조선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최근에는 노인들의 휴식처로도 알려져 있고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찾아보기 힘들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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