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제주 민속촌

浮石 2016. 5. 12. 06:00


5만여 평의 광활한 대지 위에 한 시대가 펼쳐져 있는 제주의 민속촌 이다. 오랜 조사 연구와 고증을 거쳐 복원된 건물들이며 2~3백 년 전의 전통 가옥을 돌 하나 기둥 하나까지 고스란히 옮겨와 재현해 놓은 것들이다. 19세기의 제주도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통취락단지를 구성하였다.





산촌(山村)마을 입구

한라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연취락은 557개에 이른다.이들은 해안을 따라 밀집하여 한라산 쪽으로 오를수록 적어진다.이들 마을을 크게 산촌, 중간산촌,어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곳이 산촌이다.산촌은 300m 이상의 준평원 지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반농,반목의 생활 형태를 보인다.이곳 산촌에는 막살이집,목축인의집,사냥꾼의집,외기둥집,목공예집과 연자매를 전시하고 있다.


테우(떼배)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서 육지와 가까운 바다에서 자리돔을 잡거나 낚시질, 해초 채취 등을 할 때 사용했던 통나무배.

여러 개의 통나무를 엮어서 만든 뗏목배라는 의미로 ‘떼배’, ‘터위’, ‘테위’, ‘테’ 등으로도 불리는 테우는 육지와 가까운 바다에서 이용하던 연안용 어선이었다.

제주도 연안은 지반이 험한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어 바다를 오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테우는 부력이 뛰어난 구상나무로 만들어서 암반 지대에서도 이용이 자유로워, 구상나무가 흔했던 80~90년 전까지만 해도 해안가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테우를 마련하여 주로 미역, 듬북 등 해초를 걷어 옮기는 데 이용하거나, 자리돔 등 무리 생활을 하는 어종을 자리그물로 잡는 데 이용하였다.

이렇게 잡은 자리돔은 소금에 절여 자리젓으로 만들어 놓고 밑반찬으로 일년 내내 먹었다. 영등굿에서 행하는 ‘떼몰이 놀이’는 남자들이 테우를 타고 영등할망을 보내는 ‘배방선’ 제차의 마지막 순서였다.

막살이집

세 칸의 안거리를 지을 경제적 여력이 없는 사람이 짓는 집으로, 상방이 없는 것이 특징으로 제주도 주택 평면의 가장 원시적인 기본 형태이다.

두 칸이기 때문에 세 칸 집에서의 상방 공간이 생략되고 머리와 아랫간이 붙어있는 형상이다. 평면을 2등분하여 보면, 한쪽은 정지, 다른 한쪽은 뭍똥(퇴), 구들, 고팡의 순서로 배치되고, 구들 한쪽에 굴목이 설치된다.

막살이집이 이보다 규모가 작아지면 뒷간이 없어지므로 고팡(곳간)이 없어지고 대신 정지간 안에 뒤쪽으로 조그맣게 간살이를 만들어서 고팡을 두는 경우도 있다.




목축인의집


제주의 초가 역시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민가다. 우선 참 강건하다. 외부는 돌담을 쌓고, 벽은 흙을 발라 돌담을 단단히 하고, 지붕은 새(띠)를 덮은 뒤 굵은 밧줄로 바둑판처럼 꽁꽁 얽어놓았다. 비와 바람이 많은 자연환경을 극복하려는 제주선인들의 지혜가 제주만의 초가를 지어낸 것이다. 모두 '자형이라는 것도, 사랑마당과 사랑채가 없는 배치방식도 다른 지방과 사뭇 다른 점이다. 제주민가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와 밖거리가 배치되는데, 안거리에서만 제사용 제주를 보관하고, 제사를 준비하고 지낸다. 아들이 결혼하면 안거리에는 부모세대가 살고 밖거리에는 아들세대가 산다. 그러다 일정기간이 되면 서로 바꿔 산다. 그것은 '제사'의 주체가 부모세대에서 아들세대로 옮겨갔다는 뜻이다. 친족의 일, 부조, 공동재산권, 당에 가는 일 등도 안거리에 사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안거리는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안거리에도 밖거리에도 부엌, 장독대, 통시 등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두 세대가 서로 독립된 생활을 한다. 주거단위로는 한 가족이지만 경제적 단위로는 두 가족인 셈이다. 이처럼 제주민가에는 제주만이 갖는 특이한 가족제도를 비롯해 기후에 대한 대처, 풍수지리, 무속신앙 등 복합적인 문화가 깃들어 있다.


돗통시
제주의 전통측간, 돗통시. 바람과 외부 시선을 막는 낮은 돌담벽만 있고 지붕이 없다. 발 아래서 오물이 튀거나 빠져죽을 염려도 없고 악취도 없다. 그래서 안심하고 시원하게 주변을 조망하며 일을 볼 수 있는 쾌적한 화장실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화장실 기능만 하는 게 아니었다. 돼지우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돗통시 바닥에는 보릿짚을 깔았다. 돼지는 사람의 배설물과 섞인 보릿짚은 자연 발효를 거쳐 제주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기름진 거름이 되었다. 더할 나위 없는 환경정화 공간이자 자연퇴비생산 공간이었던 돗통시 역시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출한 주거문화 요소다.




태왈을 만드는 모습

태왈은 눈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 신는 덧신의 일종으로,재료는 잘 휘어지는 윤노리 나무와 칡줄로 만들었다.눈이 많이 오는 강원도 등에서도 많이 활용한다.

올레는 집에 따라 그 길이가 짧거나 길기도 한데, 곧바르거나 휑하지 않고 곡선으로 구부러지며 넓어지거나 좁아지기도 하는 등 형태가 다양했다. 제주는 바람이 잦은 섬이다. 거친 바람도 곡선으로 성글게 쌓은 올레돌담을 지나노라면 한풀 꺾여버린다. 올레가 있어 집 내부가 쉽게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올레는 바람과 외부 시선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낭과 올레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주거경관이다.

            

전형적인 외기둥집이다. 서까래를 받아주기 위해 외기둥위에 외도리를 아슬하게 하나 걸쳐놓았다. 외부에는 기둥이 없이 서까래를 받아주는 도리를 돌벽위에 얹어놓은 형태이다.                     

재해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지었거나 시기가 맞지 않아 임시로 외기둥을 세워 만드는 집을 '외기둥집'이라고 했는데, 제주에서는 '말코지집'

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지상 주거에 있어서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보이며,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1950년대까지 존재하였다고 전한다.



모로앉은 세거리집

안거리를 기준으로 볼 때,밖거리(바깥채)가 좌측 모서리에 있고 헛간채가 안거리(안채)의 맞은 편에 있다.안거리와 밖거리의 공간 구성은 가운데 상방(마루)이 있고 좌측 칸에 정지(부엌)가 있으며 작은 구들(작은방)은 없다.모두 세 칸집이고 서로 ㄱ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안거리와 밖거리가 마주 보지 않고 서로 모서리로 이어진 형태는 제주도 북쪽보다 남쪽에서 더 많다.헛간은 공간을 이등분하여 좌측에 넓은 쇠막(외양간)을 두었고 우측에 "방애왕(곣긱을 찧는 공간)"을 두었다.위의 집은 성산읍 수산리 오인봉씨 집의 구조로 19세기 양식이다.




서각공예방

서각공방에서는 칼, 끌, 망치 등의 공구를 이용, 수작업을 통해 양각 또는 음각으로 완성된 서각 공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미로(迷路)동산 입구의 고인돌 (지석묘:支石墓)


고인돌 (지석묘:支石墓)은 크고 평평한 바위를 몇 개의 바위로 괴어 놓은 고대의 거석 구조물(Megalith)을 말한다. 아시아와 유럽, 북아프리카에 6만기 정도가 분포하며, 숫자상으로 한국에 남·북한을 합쳐 4만기 정도로 가장 많다. 고인돌의 윗쪽은 평평하며, 내부에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 세워진 연대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기원전 5,000년 ~ 기원전 4,000년, 동아시아는 기원전 2,500년 ~ 기원전 수백 년 전후로 추정된다.유럽의 고인돌들은 주변에 흙이나 작은 돌로 덮어 무덤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미로(迷路)동산 입구



대장간앞의 숯굴 가는길 입구의 하루방 조각상과 돌탑





네거리집(토호가)

안거리(안채)를 중심으로 맞은 편에 밖거리(바깥채)가 있고, 양쪽 모서리에 모커리(곁채)와 헛간이 있는 'ㅁ'자 형태의 네거리 집이다.

특히 안거리와 밖거리는 일반적인 제주초가가 세칸집인데 비해 네칸으로 구성되어 있어 귀족형 주택이라고 할 수 있다. 네거리 집은 제주도

북부 지역과 현청의 소재지였던 대정 및 정의 고을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었다.







네거리집(종가집)


이 가옥은 구좌읍 상도리 (김두영의 집)으로 18세기에 건축한 집이다. 이 문간을 들어서면 살림집인 안거리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맞은 쪽에 밖거리가 있고 왼쪽에 모커리(‘모로 앉은 집’이라는 뜻으로 보통 안거리, 밖거리 외의 곁채를 말한다.)가 있다. 오른쪽에는 헛간이 있고 뒷쪽에는 기와집인 사당이 있다. 안거리와 왼쪽 모커리는, 상방을 중심으로 볼 때 큰 구들이 위치만 다를 뿐이다. 정지 간살이 뒷쪽에 작은 구들과 샛방이 같은 위치로 배치 되었다. 청방과 사랑방에는 옆으로는 출입할 수 있도록 난간이 놓여 있다. 헛간 또한 공간 분화가 다양하다. 헛간이 통로인 동시에 방에 창이기도 한 가운데 간살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머슴방과 헛간이 있고 오른쪽에 쇠막이 있다. 제주 초가로서는 초대형인 20평 정도인 안거리와 종가에 제사보러 왔다가 묵고 갈 수 있는 청방 및 다양한 분화를 보이는 헛간 등이 이채롭다.



박씨 삼정문(朴氏三旌門)비각


이 삼정문은 조선 정조때 효자 박게곤,열녀 박씨,충비 고소락의 삼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문(旌門)으로 현재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에 있는 삼정문을 재현해 두었다.조선시대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의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삼정문을 세워 주었다.


박게곤은 제주목의 하급관리로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그는 어느날 경질된 목사를 수행하여 육지로 나가다가 풍랑을 만나 무인도에 갇히게 되었다.그는 부모님 보다 먼저 세상을 뜨는 불효를 저지르게 된 원통한 심정을 판자에다 적어 바다에 띄어 보냈다.그 판자는 해류를 따라 그의 집 앞 바닷가에 닿았고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그 판자 조각을 발견하고 관청에 이 사실을 고하여 박게곤 일행을 무인도에서 모두 구하게 되었다,


제주 사람들은 그의 효성이 하늘도 감동시킨 것이라고 칭송하였다.또 그의 딸 열녀 박씨는 일찌기 남편을 여위였으나,죽을 때가지 지조와 절개를 지켰으며,그녀의 이런 행동을 본 받아 그녀의 몸종이었던 고소락도 시집가지 않고 평생동안 주인을 섬기었다고 한다.이런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임금은 박씨삼정문을 내리고 세사람의 장한 뜻을 기리도록 했다.


삼정문 옆의 기원 돌탑










제주의 전통뗏목배인 테우와 어구, 해녀들이 사용했던 작업도구, 해녀복 등 바다에서 사용했던 각종 어업관련 도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물 : 테우, 아시와 공젱이, 듬북낫, 소살, 성게골각지, 정게호미, 물소중이 등


대장금 미니테마파크

2003년 12월 11일부터 27일까지 17일 간 제주민속촌을 배경으로 드라마 '대장금'이 촬영되었는데, 당시의 촬영 장면과 대사, 출연진의 사인이 담긴 안내판과 포토존이 있다.
특히 대장금 미니테마파크에는 대장금 의상, 촬영 당시 대본, 약초, 관련 사진 및 의료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어린이나 노약자를 위해 무료로 운행 중인 민속촌 관람열차. 






제주영문


조선왕조 시대 때 제주목의 관아 건물들을 '제주영문'이라한다. 제주영문의 본청은 목사의 집무처였다. 여기서 제주 목사는 행정을 펴고 송사를 보면서 해적의 침입을 대비하고 공납을 관장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등 모든 정무를 처리 하였다.


본청의 객실에는 제인, 일수, 사령들이 대기하며 목사의 잔 일거리들을 보조하였다. 본청 옆의 초가는 죄수들을 가두었던 옥으로서, 통나무 창살로 칸막이를 하였다.
본청 앞의 치(?)대문과 내대문 사이 왼쪽에 배치된 향청에는 좌수 1인, 별감 2인, 흉사 4인이 근무하였었다. 이들은 목사의 자문에 응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풍속을 바로 잡기 위하여 향음주례와 향사례 같은 의례도 거행하였다. 향청은 달리 을량소, 향사당이라고도 불렀었다. 향청의 일원이 모두 민간에서 임명된 점으로 보아 관리와 백성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청의 오른쪽에는 영리청이 있다. 이곳에서는 이, 호, 예, 병, 형, 공의 6부 관리들이 호적을 관리하고 조세를 거둬들이고, 환곡과 진상품을 관리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를 맞거나 보내고, 목사의 순회를 맡는 등의 일을 시행했다.


대청 마루 앞에 놓인 형틀

연희각(延曦閣)


연희각은 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執務處)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命名)된 것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懸板)도 누가 명명(命名)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精誠)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심연(沈演, 1638. 6∼1640. 9)의 시(詩)가 부기(附記)되어 있고 또 이 때 목사의 겸직(兼職)이었던 절제사(節制使)가 방어사(防禦使)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연희각도 이 때 건립되었거나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목사의 겸직은 1642년(仁祖 20)에 다시 절제사로 바뀌었다가 1713년(肅宗 39)부터 다시 방어사라 하였다. 그 뒤 이 건물은 1884년(高宗 21)에 홍규(洪圭) 목사가 중수(重修)하였으나 1924년 여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추사전시관
추사 전시관에는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 1786~1856)의 영인본 작품 50여 점이 있다.







김만덕 드라마세트장








파종에서부터 수확할 때까지 사용하는 농기구들을 종류별로 구분하여 전시해 놓았습니다. 제주도의 땅은 대부분 화산회토로 되어 있으며, 돌이 많아서 농기구들도 다른 지방과 많은 차이가 있다.
전시물 : 따비, 쟁기, 곰배, 남테, 돌테, 골갱이, 질메, 보리클, 산듸클, 얼맹이, 멍석, 우장 등







제주의 전통 생활 풍속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공간이다. 100여 채에 이르는 제주의 전통 가옥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산촌, 중산간촌, 어촌, 무속신앙촌 등으로 나누어 제주도 특유의 민속 문화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으며 그 안에는 생활용품, 농기구와 어구들을 비롯해 가구와 석물까지 약 8,000여 점의 자료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가옥 내에서는 민속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의 솜씨를 지켜볼 수도 있다. 산촌마을에서는 막살이집, 외기둥집, 사냥꾼의 집, 목축업의 집 등 한라산 일대의 산촌 가옥 형태를 알 수 있으며 각 가옥 안에 정주석과 정낭, 허벅, 나막신, 갈옷, 가죽감태, 족덫 등의 생활용구와 사냥도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해발 100~300m에 이르는 구릉 지대의 가옥 형태를 보여주는 중산간촌에는 종갓집, 유배소, 서당, 대장간, 나무 농가 등과 그 안에 숯굴, 애기구덕, 멍석, 남절구, 씨앗틀 등의 농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자연용출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주의 어촌마을을 보여주는 어촌에는 어부의 집, 해녀의 집과 어구 전시관 등이 있으며 광령물통, 갈치술, 테우, 빗창, 테왁 등의 어구가 전시되어 있다. 무속신앙이 발달한 제주의 모습을 보여주는 무속신앙촌에는 심방집, 포제단, 해신당, 미륵당 등의 건물에 동자석, 방사탑과 무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주 관아를 재현해 놓은 제주영문에는 향청, 영리청, 연희각, 옥사 등이 있고 형틀과 등돌, 투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제주의 전통 공예품을 전시해 놓은 공예방과 민구류 전시관, 제주의 전래작물 100여 종을 재배하고 있는 향토재배 작물밭도 둘러볼 수 있다. 시끌벅적 장터를 재현해놓은 민속장터에서는 다양한 제주 먹거리를 즐길 수 있으며 놀이마당에서는 씨름, 투호, 널뛰기, 팽이치기 등 전래 놀이를 체험해볼 수 있고 승마체험과 전통혼례체험도 할 수 있다. 무형문화의 집에서 영상자료와 녹음자료를 통해 사라져가는 제주의 모습을 만나보는 것도 특별한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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