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

浮石 2017. 2. 23. 06:00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7호)


4매(枚)의 돌로 된 지대석 위에 24잎의 외겹 내림연꽃을 조각한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갑석형을 조각한 판석을 두었다. 중대석은 용머리를 한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 용이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모습을 부조했는데, 거북은 머리만 오른쪽으로 돌리고 몸은 정면을 향한 자세이다. 세부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중대석 위의 갑석은 팔각형이며 그 위에 잘룩한 받침대 위로 8잎의 외겹 올림연꽃을 조각했다.

8각의 탑신 4면에는 문짝을,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조각했으며 그 위로 8각의 옥개석이 놓여 있다. 옥개석 밑에 이중의 받침을 새겨 서까래를 대신했다. 추녀는 수평이나 여덟 모서리에 귀꽃을 달아 약간 위로 반전되어 있다. 옥개석의 윗면에는 기왓골의 표현이 없고 8개의 우동이 표현되었으며 정상부에 이르는 경사도 완만하다. 상륜부에는 8각 노반과 꽃 모양이 조각된 복발, 귀꽃이 화려한 팔각의 보개, 보륜과 보주를 얹었다.

비문에 의해 나말려초의 고승 원종대사 찬유(璨幽:869~958)의 묘탑임을 알 수 있고, 975년(광종 2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대석의 조각이나 하대석의 연판 형태는 고려 초기 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전체 구성을 볼 때 중대석이 다소 비대해진 감이 있고, 기단부가 4각인 점은 고달사지에 있는 또다른 석조부도가 8각기단인 점과는 차이가 있다. 규모나 각 부분의 비례, 장식면에서 장중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10세기 부도의 걸작품이다.





현재는 폐사된 고달사가 있던 사찰터.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던 사찰로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 광종(光宗) 이후 역대왕들의 비호를 받던 사찰이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절터는 여주시 혜목산(慧目山) 산자락에 있다. 고달사 석조물은 모두 고달이란 석공이 조성했다는 전설이 있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불사에 혼을 바쳤다고 한다. 불사를 끝내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었으니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실로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으로 추정되며 절 부근에 큰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 광활한 사역에는 유물만 남아 있다. 현재 절터는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가 조직적으로 진행 중이다.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


원종대사 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


고달사지 귀부


이 귀부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에서 북쪽으로 4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과 이수가 남아있지 않으며, 귀두와 비좌에 파손된 부위가 많다. 귀부의 귀두는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와 동일한 방향을 보고 있으며, 원위치로 추정된다.


지대석과 귀부는 동일석으로 치석되었다. 지대석은 사각형으로 상면에 낮은 1단의 괴임을 두어 귀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귀신은 낮게 올라와 있고 뒷부분에 꼬리가 살짝 나와 있다. 발은 귀신의 사방에 있는데, 짧게 나왔으며 발이 나와 있는 귀신 부위에만 주름문이 표현되었다. 앞발은 전방을 향하고 있으며, 뒷발은 측면을 향하도록 하였다. 발가락은 5지로 형식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귀부의 귀두는 결실된 상태이다. 목줄기 좌우에는 주름문이 반복 표현되었으며, 귀갑대는 일정한 너비로 마련하였다. 귀갑대에는 촘촘하게 주름문이 반복되어 있으며, 귀갑문은 1조의 돋을대를 육각형으로 구획한 후 다시 그 안에 1조의 돋을대를 육각형으로 돌려 표현하였다. 귀갑문의 표현 기법은 바로 옆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비와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귀부의 상부 가운데에는 비좌를 마련하였는데, 비좌의 서쪽편이 심하게 파손된 상태이다. 비좌가 있는 귀부 주위로는 구름문을 가득 장식하였다. 그리고 비좌는 수직에 가까운 복판 앙련문을 사방으로 돌려 조식하였는데, 연화문은 2중으로 상하에 나란히 배치하였다. 앙련문 상부에는 갑석형 비좌받침을 마련하였다. 비신홈 주위에는 비신괴임이 있고 비신홈의 규모는 114×22cm이다. 따라서 비신은 큰 규모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달사지 귀부는 원종대사혜진탑비에 비하여 소형이다. 그런데 등줄기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도록 한 점이나 비좌 주위에 있는 귀갑에 구름문을 가득 조식한 점 등은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비좌 주변에 표현된 구름문과 앙련문은 고려시대 탑비의 비좌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원종대사혜진탑비는 귀부의 전체적인 평면이 사각형을 이루고 있지만 고달사지 귀부는 뒷부분을 반원형으로 하여 타원형에 가까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귀부의 전체적인 평면은 통일신라시대에는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사각형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고달사지 귀부는 마모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세부 표현 기법에서 원종대사혜진탑비처럼 역동성과 비사실적인 과장된 표현보다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탑비에서 귀부의 전체적인 규모는 통일신라 말기에는 작아지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대형화되는 추세였다. 이러한 점 등을 감안할 때 고달사지 귀부는 원종대사혜진탑비보다 빠른 시기인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달사는 원감국사 현욱(787~868)과 원종대사 찬유가 입적한 사찰이었다. 두 승려는 국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던 고승이었다. 따라서 석조부도와 탑비가 건립되었으며, 중앙정부로부터 후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런데 현재 원종대사혜진탑비는 이수 제액의 명문으로 보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반면에 원종대사 찬유보다 빠른 시기에 입적한 원감국사 현욱의 탑비는 아직까지 그 구체적인 실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원종대사 찬유가 원감국사 현욱의 법손제자였음을 감안할 때 원감국사 현욱의 탑비가 원종대사혜진탑비보다 이른 시기에 입적 사찰인 고달사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달사지 귀부가 원감국사 현욱의 탑비에 활용된 귀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고달사지 석조불대좌(보물 제8호)

현재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 있는 석불대좌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높이 157cm. 상·중·하대와 지대석을 모두 갖춘 4각대좌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상대석에는 겹으로 된 올림연꽃 24잎을 조각했고 그밑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중대석의 간석은 4각이며 각 면에 안상을 하나씩 가득차게 새겼다.


하대석에는 3단 받침이 간석을 받치고 있으며, 그 밑에 겹으로 된 내림연꽃 24잎을 상대석과 같은 배열로 새겼다. 하대석 밑에는 턱이 진 각형받침 한 단이 있는데 그 측면에는 안상을 각각 4개씩 나란히 새겼다. 넓은 지대석은 대좌 전체를 안정감있게 받쳐주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대좌는 예천 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425호)의 대좌 등 고려시대의 예가 몇 점 더 전하고 있어 고려시대에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것 같다. 연잎의 형태가 좌우로 갈수록 비스듬히 배열된 것은 고려 초기 석물에서 보이는 연화무늬의 시대적 특징으로 같은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에서도 보인다.

원종대사혜진탑과 비슷한 10세기에 제작된 불상의 대좌로 추정되며, 대좌의 규모나 제작수준으로 보아 그 위에 놓였던 불상의 규모도 짐작해볼 수 있다.


'서울,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포공항 전망대  (0) 2017.03.04
개화산 약사사(藥師寺)  (0) 2017.03.02
봉영사(奉永寺)  (0) 2017.02.02
봉선사(奉先寺)  (0) 2017.01.31
천보사(天寶寺)  (0) 2017.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