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봉선사(奉先寺)

浮石 2017. 1. 31. 06:00


진접읍 봉선사길 32


봉선사는 크낙새와 수목원으로 널리 알려진 광릉에서 아주 가깝다. 광릉 매표소에서 광릉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전나무 숲길 따라 남동쪽으로 1.5km쯤 내려가면 수십채의 식당이 영업 중인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300m 가량 들어간 곳에 봉선사가 있다.
봉선사의 역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 원래 봉선사 자리에는 고려 광종 20년(969년) 법인 국사가 창건한 운악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여러차례 난리를 겪으며 폐허가 된 것을 1469년(조선왕조 8대 임금 예종 원년) 정희왕후 윤씨(7대 세조의 왕비)가 세조의 영혼을 봉안코자 다시 일으켜 세운 뒤 봉선사라 개칭했다. 이 후 봉선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과 중건을 7차례 했다.
절에서 100m 떨어진 곳에 큰 비석 여러 개가 눈길을 끈다. 그 중 하나가 춘원 이광수선생 기념비다. 그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하기 전 4년 동안 남양주 사능 부근 작은 집에서 산적이 있는데 그때 한해 겨울을 봉선사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당시 주지 스님이 운허라 그런 인연을 맺은 것이다. 비석에는 그가 남긴 글중 일부를 빼곡히 새겨 놓았는데 글은 주요한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써서 1975년 가을에 세웠다.

청풍루

1715년(숙종 41) 청풍루(淸風樓)를 신축

 

봉선사(奉先寺)는 진접읍 부평리 운악산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이다. 『봉선사본말사지』 「봉선사」조에 의하면 운악산은 한국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히는데 동쪽은 금강산, 서쪽은 구월산, 남쪽은 지리산, 북쪽은 묘향산, 그리고 가운데가 운악산이다.  

이것은 중국의 오악(五岳)을 모방한 것으로 경기지방 역시 이를 설정하여 개성의 송악, 과천의 관악, 연천의 감악, 가평의 화악, 양주의 운악이라 하였다.   봉선사는 969년(광종 20)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운악사(雲岳寺)라 하였다 전한다.  


1469년(예종 1)에 예종이 이 절 이름을 봉선사라 지어 사액하였는데 이것은 선왕의 능침을 수호하는 원찰이라는 의미이다.   김수온이 지은 「봉선사기」에 의하면 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운악산에 능을 마련하고 세조의 능침 사찰로서 절을 중창하였다.   중창 불사는 1469년 6월에 시작하여 9월에 마쳤는데 여기에는 세조의 유일한 부마 하성부원군 정현조와 세조의 공신 상당부원군 한명회, 능성부원군 구치관 등이 영건제조(營建提調)가 되어 능실 남쪽 아늑하고 물맛 좋은 곳에 터를 잡아 절을 짓는 데 참여하였다.

모두 89칸의 적지 않은 규모였는데 짓는 도중 부실공사라 하여 당시 세조와 정희왕후의 신임이 두터웠던 고승 학열(學悅)과 학조(學祖)에게 승당(僧堂)을 허물고 다시 짓게 하였을 정도로 정성들여 지은 건물이다.  


1472년(성종 3)에는 숭은전(崇恩殿)을 봉선전(奉先殿)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1480년에 왕명으로 절을 보수하였으며, 1488년에는 전각의 지붕을 청기와로 바꾸었다.그 후 연산군 때는 봉선사에 두었던 2인의 참봉제도를 폐지하는 등 사세가 축소되었으나 중종 이후 봉은사와 함께 다시 왕실의 원찰로 중요시되었다.   1551년(명종 6)에 봉은사는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 봉선사는 교종(敎宗) 수사찰로 승격되었는데 이것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불교계에 새로운 활력이 일어나면서 비롯된 결과이다.


문정왕후는 1550년 12월 15일 당시 우의정이었던 상진(尙震 : 1493∼1564)에게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선교 양종을 복립(復立)하고 봉은사를 선종 수사찰, 봉선사를 교종 수사찰로 정할 것과 승과(僧科)를 부활하여 선교 양종의 인재를 시험으로 뽑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1551년 6월 25일에 보우(普雨)를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로, 수진(守眞)을 판교종사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의 주지로 임명하여 전국의 선종과 교종사찰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식년시와 증광시에서 모두 승과를 보게 하여 1552년에는 봉선사에서 승과고시인 교종시(敎宗試)가 열려 국가에서 공식으로 인정하는 승려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1566년에 선·교 양종이 백지화되어 봉선사도 타격을 받았는데 이것은 불교 부흥의 중심에 있었던 문정왕후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교종의 맥을 잇는 학승들은 항상 봉선사를 근본 도량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 후 봉선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점령해 사용하다 퇴각하면서 방화하여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이때 낭혜정현(朗慧正玄)에 의해 대웅전과 약사여래좌상은 화를 모면하였으며, 세조의 어진(御眞) 또한 승려 삼행(三行)이 모셔내어 광릉 참봉이었던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의주 행재소로 모시고 갔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왜군이 물러간 후 1593년 주지 낭혜는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였으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청군에 의해 다시 전각 일부가 소실되는 화를 입게 된다. 이에 1637년 계민(戒敏)이 조정의 힘을 빌려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였다.  이후 1715년(숙종 41) 청풍루(淸風樓)를 신축하였고, 1749년(영조 25) 주지 재점(再霑)이 법당을 중수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는 정희왕후가 중창했을 때 근처 묘적암에서 모셔온 약사여래좌상을 개금하였다.1790년에 봉선사는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백련사·흥국사·용주사·봉은사·봉선사를 5규정소로 정하여 왕실이 안녕을 빌고 전국의 사찰을 감독하게 할 때 봉선사는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게 되었다.  1902년(광무 6)에는 원흥사(元興寺)가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 되면서 봉선사는 전국 16개 수사찰 가운데 하나가 되어 경기도 내 본산이 되었다. 그리고 1911년 일제에 의해 전국 사찰을 31개 대본산을 두어 각기 말사를 다스리게 할 때 봉선사는 그 중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도 북부 일원의 교정을 관장했다.

1968년 전국을 25개 교구로 나눠 교정을 분장할 때 제25교구로 선정 되어 고양군을 제외한 한강 이북 10개 시·군 80여개소의 말사에 대한 종무를 관장하고 있다.한편 1963년 봉선사대종이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이 대종은 음통이 없는 조선 초기의 동종양식을 나타내는 종으로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다.




해태상

봉선사에 가면 가장 먼저 찾아볼 것이 대웅전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이다.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큰법당이라고 한글로 쓴 것이 이채롭다. 1970년 운허선사(춘원 이광수 팔촌 동생)가 대웅전을 세우면서 써서 달았다.










회랑









경내에 봉선사 대종(보물 제397호)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만든 동종 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것으로 예종 원년(1469)에 왕실의 명령에 따라 만들었다. 조선왕조 전기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동종(銅鐘)보물 제397호


진접읍 봉선사 경내에 봉안된 동종(銅鐘)으로 정상부에 쌍룡(雙龍)의 뉴(꼭지)가 있고 음통(音筒)이 없는 것이 조선 전기 동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종 꼭대기에는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하고 있으며, 앞발로는 여의주를잡고 양 몸체를 구부려서 그 위에 또 하나의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종견(鐘肩:어깨부분)에는 큰 단엽복판연화문을 돌렸으며 종견 바로 밑에 돌출된 두 줄로 횡대를 돌려서 종신(鐘身)과 뚜렷한 구분을 지었다. 

종신 중앙에는 굵고 가는 세 줄의 횡대를 돌려 크게 상하를 구분하고 윗부분에는 유곽(乳廓:큰 젖꼭지 모양이 있는 사각 부분)과 보살상(菩薩像)이 교대로 배치되었다. 유곽은 종견의 횡대에서 분리되어 운당초문(蕓唐草文)이 얕게 조각된 정사각형 구획 안에 연화유좌(蓮華乳座)에서 돌기된 9개의 종유(鐘乳)가 돌출되어 모두 네 곳에 배치되었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원형 두광(頭光)을 띠면서 두 손을 마주잡고 연화위에 서 있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유곽 밑과 중앙 횡대사이 공간에는 굵은 획의 범문(梵文)이 새겨져 있고 보살상 상하 네 귀에도 같은 형식의 범자가 양각되어 있다.


중앙 횡대 밑에는 종구(鐘口)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폭이 넓은 횡대를 두었으며 횡대 안에는 사실적으로 잘 묘사된 해파문(海波文:파도문)이 가득히 새겨져 있다. 또 횡대와 중앙 횡대와의 넓은 공간에는 강희맹(姜希孟)이 찬(撰:글짓다)하고 정난종(鄭蘭宗)이 서(書:글을쓰다)한 긴 종명(鐘銘)이 있어 주종(鑄鐘)의 연유를 알 수 있다.  


이 종명에 기록된 연대가 ‘성화오년(成化五年)’이라 적혀있어 1469년(예종1)에 정희왕후가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봉선사를 세울 때 함께 주조(鑄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종구가 넓어진 전체의 형태나 종신의 횡대, 조각수법 등은 고려양식에서 탈피하여 조선시대 범종 양식의 선례가 되는 작품으로 주목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봉선사에서 종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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