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가산 보문사(洛伽山 普門寺)
가파른 고갯길을 5 ~ 10 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문 밖의 사바세계와 문 안의 부처님의 세계를 나누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일심(一心)의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하여 성불하라는 큰 뜻이 있다.
보문사에 들어서면 초입에 수천 개에 달하는 불상들이 층층 계단에 올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각기 다른 불상들 표정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째서 이렇게 많은 불상들이 모여 있을까? 635년(선덕여왕 4년) 한 어부가 바다에서 건진 22개의 불상을 낙가산에 모시면서 보문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그로부터 1000년도 더 지난 1812년, 중창을 거쳐 보문사는 가람의 기틀이 잡아갔다.
석포 선착장에서 차량으로 15분간 들어가면 낙가산 서쪽바다가 굽어 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자리잡고 있다. 선덕여왕 4년(635) 회정대사가 금강산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절을 세우고 보문사라 하였다. 절 뒤편에는 마애석불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앞에서 보이는 서해풍광 또한 일품이다. 보문사 경내에는 3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했을 당시 사용하였다는 큰 맷돌과 향나무, 1975년에 주조한 범종이 있다.
보문사 석실 나한전
700년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향나무 지척의 석실에는 어부가 바다에서 건졌다는 나한상들이 모셔져 있다. 이 땅에서는 드문 석굴사원으로 ‘나한전’이라고도 한다.
절을 창건 후 14년이 되던 해에 고씨성을 가진 어부가 바닷가에서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그물로 낚아올려 절의 우측 석굴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때로부터 이 석굴에 기도를 하면 기적이 이루어져 많은 신도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壇)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눈썹바위
400여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처마처럼 드리워진 눈썹바위 아래 마애불과 만난다. 눈썹바위 밑으로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쓴 관음보살은 1928년, 일제강점기에 조성됐다. 중생들의 간절한 소원 하나쯤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영험한 부처로 소문났다.
400개의 계단이 겁이나 올라가보지도 못하고 멀리서 조금 보이는 눈썹바위.
보문사 입구의 농산물 노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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