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인평대군묘(麟坪大君墓)

浮石 2017. 6. 17. 07:43


정남향의 매우 너른 묘역은 신도비가 서 있는 아래쪽에서 보면 봉분이 폭 파묻혀 보이지 않고 둔덕만 높이 올라와 있는 게 이상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봉분 가까이 올라보면 사방이 시원스레 넓은데다 앞면이 툭 트인 게 전망이 좋다. 봉분 저 아래 신도비 앞으로 향나무를 나란히 심은 뜻도 비로소 알 수 있다. 앞이 너무 트여 허해보이기까지 하는 것을 도열해 서 있는 향나무가 아늑하게 막아주는 것이다.

곡장을 두른 봉분 앞에는 비가 서 있고, 그 앞으로 상석, 양 옆으로 특이하게 동자상 같은 작은 문인석이 서 있는데 어찌나 앙증맞고 표정이 천진스러운지 귀엽기만 하다. 그 바깥 양 옆으로 한 쌍의 망주석과 수염이 긴 턱에 홀을 대고 있는 문인석이 있으나 상호는 그리 좋은 편이 못 된다. 상석 앞에는 장명등이 있고, 묘 한쪽으론 자그마한 거북이 있는데, 비신이 올려졌던 홈이 있는 것으로 봐서 어디엔가 놓였던 귀부임에 틀림없다.

네 분 왕의 손으로 직접 치제문을 써 비를 세울 만큼 정성이 각별해서일까. 인평대군묘는 거의 왕릉에 머금갈 정도로 화려하고 잘 다듬어져 있으며 석조물도 매우 정교한 편이다. 상석 앞의 석등만 보아도 4각의 책상다리 석등인데 그 위에 꽃보자기처럼 덮인 귀꽃이 화려하고, 그 위 잘록한 허리에 목단이 선명하게 수놓아져 여간 공력을 들이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화창 위에 놓인 지붕돌이 몸체에 비해 다소 큰 게 흠이라면 흠일까.

시서화에 뛰어났던 인평대군은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 뒤에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그림을 논하면서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된다. 따라서 그의 그림 「고백도」에서 보여주는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는 맹영광의 공필법()에 영향을 받고, 「산수도」의 다소 거친 필치는 맹영광의 절파풍()에 가깝다는 평을 받기에 이른다.

현재 인평대군의 작품은 아주 적은 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개인 소장의 「노승하관도」(), 「고백도」()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송계집』, 『연행록』(), 『산행록』 등이 있다.




인평대군(, 1622~1658)은 인조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1630년 인평대군에 봉해졌다.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 호는 송계(), 시호는 충경(). 인평대군은 효종을 비롯한 형제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효종은 가끔 사복을 하고 나가 동생 인평대군을 만나곤 했다고 전한다.

그는 아깝게도 서른여섯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 짧은 생애를 사는 동안 왕족으로서의 파란을 겪는다. 1640년(인조 18), 병자호란에 패한 대가로 앞서 가 있던 소현세자·봉림대군 뒤를 이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이듬해 돌아오긴 했으나 그뒤 1650년부터는 사은사(使)가 되어 네 차례나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관의 중책을 치러낸다. 그는 시서화()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등 학문에도 정통하고 밝았으며 사람을 대하는 수완이 뛰어났던 것이다.

묘소에서 약 60m쯤 앞쪽으로 신도비가 있다. 화강암은 아니고 바닷돌 같기도 한 거대한 돌에 조성했다. 거북이 목에 힘줄이 불거질 만큼 무겁게 비신을 지고 있는데,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머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거북의 등판을 푹 덮고 있는 거대한 연잎은 아래로 휘늘어져 내려오다 끝부분에서 뒤로 생동감 있게 젖혀지는데 조선 전기를 지나며 등장하는 석비양식이다. 그 위로 거대한 비신이 안치돼 있고, 두 마리의 용이 얼굴을 마주보며 꿈틀꿈틀 용틀임을 하고 있는 이수의 각이 퍽 깊다. 신도비는 효종 9년(1658), 인평대군이 영면에 든 그해에 건립해 세웠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30호이다.


묘역에 들어서면 봉분 정면 앞에 신도비가 서 있고, 능역의 구도에서처럼 오른쪽으로 비껴 앉은 비각 안에 치제문비가 있다. 하나의 비각 안에 2개의 치제문비가 안치돼 있는데, 바로 그 인평대군의 인품과 업적을 기리고, 짧은 생애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네 분 왕이 친히 제문()을 적어 새긴 비로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오른쪽의 제1비는 앞면에 효종이 직접 쓴 제문을 초서체로 조각했고, 뒷면에는 숙종의 어필 제문을 해서체로 명각()했으며, 제2비는 앞면 상단에 영조의 어필을, 아랫면엔 꼿꼿하고 깔끔한 정조의 글씨를 새겨 담아 인평대군에 대한 역대 왕들의 따스한 마음과 글씨가 전해진다. 제2비 뒷면은 비어 있다.


이들 왕들은 또 “세 번씩이나 심양에 들어갔고, 아홉 번을 변경에 들어감이 명백히 사첩()에 실려 있네” 하는 제문을 직접 지어올리며 짧은 생애의 인평대군을 위해 자주 제사를 올렸던 기록이 있다. 치제문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5호이다.



효종·숙종·영조·정조의 어제 친필()로 된 치제문비()를 포함해서 2기의 치제문비가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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