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행사(萬行寺)

浮石 2018. 12. 14. 06:00


1529(교로쿠 2년 성공(칠리 하야토)이 렝뇨의 명령에 의해서 건립한 정토진종(淨土眞宗) 니시혼간지파의 "만행사(만교지)"이다. 구시다신사에서 도보 1분 정도 걸린다. 마음이 안정되는 평화로운 곳이다. 




만행사는 1529년에 개산(開山)하였고, 1665년 기온마치로 옮겼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에 칠리항순(七里恒順)이라는 고승이 경내에 용화(龍華) 고아원을 세우고 운영하는등 사회공헌을 많이 한 절로 유명했다고 한다.

또한 메이지 시대에 법을 들으려면 하카타의 만행사로 가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명창명월 묘(名娼明月 墓)

유녀 명월(죽음 이야기의 주인공)의 무덤이 있고 초이레에는 묘안의 유골에서 새하얀 연꽃이 피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신란(鸞) (1173년 ~ 1262년)

작공()ㆍ선신()이라고도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불교인. 정토진종()의 창시자.

중류 귀족 히노아리노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비예산()에 들어가 당승()으로서 수학을 하지만 후에 법연()의 제자가 되어 본원타력()의 전수염불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그 주요저서 『선택 본원염불 집』의 서사()를 허락 받았다.


1207년 염불 탄압시에 월후()의 고쿠후( : 율령제도 하의 지방행정 관청)로 유배되었다. 이 때 속명을 얻어 ‘우독(禿)’을 자칭하게 된다. 1211년 사면 후 상륙국 입간군() 도전()으로 이주. 주변의 포교에 전력함과 동시에 주요저서 『교행신증()』의 초고본을 완성한다.


1232년경 귀경. 사망할 때까지 교토에서 집필활동과 관동()의 문하생에 대해 편지에 의한 지도를 하였다. 말년에는 교의 해석의 대립으로 식남선란()과 의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혜신니()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고 추측되지만 미상. 유명한 『탄이초()』는 그 말을 제자인 유엔()이 써 둔 것이다.


신란 사상의 골격은 그 스승인 법연을 계승한 것이지만 신란의 특징으로서 첫째는 자기를 포함한 동시대인에 대한 철저한 ‘악인()’ 시()를 들 수 있다. 어떠한 기성의 불법()의 구원에서도 누락된 말법()의 악인의 자각은 극악인도 구원하는 아미타의 본원의 위대함의 강조와 절대 타력의 신앙의 심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둘째는 법연이 아미타불을 외우는 ‘행()의 일념’을 중시한 것에 대해 신란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신()의 일념’을 강조한 점을 들 수 있다. 신란은 염불의 행자가 미타()의 본원의 빛이 비추어지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 그 극락정토로의 왕생이 확정된다고 주장한다. 그 때 행자는 부처의 믿음을 부여받은 존재이지만 따라서 그 내면은 부처와 동일하게 된다(여래동등()). 이후 그의 염불은 구원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확정된 것을 감사하는 ‘불은보사()’의 염불이 되었다.


신란의 정치사상을 둘러싸고 그 편지에서 볼 수 있는 ‘황실의 통치와 국민을 위해 염불을…’ 이라는 말을 둘러싸고 호국사상의 유무가 논의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전후의 연구의 대부분은 신란이 굳이 국가나 호국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에 그 의의를 찾는 방향으로 향하였다. 즉, 고대 호국불교가 지배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에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는 '왕법위본()’의 입장에 그친 것에 대해 신란을 비롯한 '가마쿠라 불교’는 고대의 불교에 결여되어 있던 민중 개개인의 심령구제의 문제를 우선적인 사명으로 내걸고 ‘신심위본()’의 입장에서 모든 사람들의 평등한 구제를 이론화한 점에 그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최근 왜 그러한 견해의 전수염불이 권력의 탄압을 받았는가, 왜 그것이 반체제의 운동과 연계되었는가 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중세의 정치적ㆍ사상적 상황 속에서 신란의 사상이 차지하는 객관적 위치를 해명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신란의 ‘일향전수()’와 ‘선택’의 이론이 갖는 반체제적인 이데올로기성이 지적되고 있다.


신란의 가르침은 정토진종 여러 파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근대에 들어서자 신도 이외의 지식인에 의한 신란의 재평가가 이루어져 신란 불이 일었다. 신란과 함께 주목받은 일련의 경우 그 사상이 정치적ㆍ사회적 운동에 관계한 것에 대해 신란은 그 내면을 응시하는 자세가 근대 지식인의 공감을 얻어 신란을 제재로 한 창전백삼()의 "출가와 그 제자"등의 문예작품도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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