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실학박물관

浮石 2018. 12. 26. 06:00


실학 박물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6

 2017년 9월 1일부터 관람료가 무료로 운영.


관람시간 안내

1월~12월/ 10시~18시

휴관일 안내 : 매주 월요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일 경우 제외)

                   매년 1월 1일과 설날
                   추석 당일














실학자 이중환李重煥(1690~?)이 쓴 지리지로, 우리나라의 인물ㆍ산업ㆍ생산ㆍ소비ㆍ주거ㆍ인심 등 인문 지리 내용이 종합되어 있다. 이후 ‘팔역지八域誌’·‘팔역가거지八域可居地’·‘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동국총화록東國總貨錄’ 등 다양한 이름으로 필사되었다. 주요내용으로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유래 등을 정리해 놓은 ‘사민총론四民總論’, 조선 팔도의 위치와 그 역사적 배경을 요약한 ‘팔도총론八道總論’이 있다.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는 거주시 필요한 조건으로 지리地理·생리生利·인심人心·산수山水를 설명해 두었다.

2018년 실학박물관 특별 기획전 《택리지, 삶을 모아 팔도를 잇다》

2018.10.23.(화) – 2019.2.28.(목)


택리지擇里志는 이중환의 인문지리 저서로, 제목대로 “살 곳里을 고르는擇 방법志”을 담은 책이다. 택리지는 팔도의 역사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당대의 인상, 그리고 살만한 곳에 대한 이야기이다. 택리지는 당대에도 200여종의 이본異本이 있을 만큼 크게 유행했다. 현재도 택리지는 인문지리서이자 풍수지리서로 많이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살 곳을 정하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저자는 택리지의 말미에 “살만한 곳이 없다我瞻四方 蹙蹙靡所聘”고 한다. 당대의 세태와 시대적인 분위기에 하고 싶은 말을 글 속에 숨겼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택리지로 전달하고자 한 이중환의 생각을 전시로 연출해 보았다. 또한 택리지 정본 사업의 성과와 수많은 이본, 종가에 보관되었던 이중환의 흔적들도 함께 공개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혼천의
혼천의는 태양계의 행성 등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기구이다. 천체의 운행을 보여주는 우주모델이면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일종의 천문시계의 역할을 하였다. 왕권을 상징하며, 왕도정치이념을 구현하는 상징적인 도구로도 여겨져 동아시아에서는 중요한 천문의기로 다루어져 왔다.

선기옥형璇璣玉衡 혹은 혼의渾儀라고 불리기도 했다. 혼천의를 처음 만든 나라는 중국으로, 기원은 요순시대였다고 하나, 문헌상으로는 한 무제 때 낙하굉落下閎이 처음 만들었다.

후한 때는 장형張衡(78~139)이 혼천설이라는 우주론에 근거하여 혼천의를 제작하였다고 전한다. 조선에서 혼천의는 1433년(세종 15)에 정초, 박연, 김진 등에 의하여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왕은 천문을 관측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동양적 천문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천문학이 발달하면서 새롭게 보완되고 변화되었다. 이 혼천의는 천문학교수였던 송이영宋以穎(1619~1692)이 제작한 혼천시계(국보 230호)의 혼천의 부분만을 제작한 것이다.


1669년 천문학 교수였던 송이영은 1657년에 제작된 수격식 혼천시계를 수리하면서 개량된 천체운행 메커니즘을 고안했다. 이때 전통적인 동력발생 장치였던 수력 대신 서양 자명종의 추동력을 사용함으로써 혼천시계의 정밀한 작동과 정확성을 획기적으로 높여주었다. 혼천의에는 태양운행과 달 운행을 표현했으며, 지구의를 장착하여 지구와 태양과 달의 상대적 운동 메커니즘을 구현하였다.

18세기에 홍대용洪大容(1731~1783)은 혼천의와 자명종을 연결해 혼천시계를 제작하였고, 이후 19세기 초에는 강이중姜彛中과 강이오姜彛五가 추동력 혼천시계를 제작하였다.



천리경


천리경은 망원경을 말한다. 천리까지를 볼 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천리’는 “매우 멀다”는 뜻이고, 실제로 백리 정도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백리만 하더라도 현재 거리로 40Km이니 대단한 것은 분명하다.


이 자료는 1700년대에 영국에서 만든 굴절망원경으로 일본에 수입된 것이다. 조선에서는 1631년에 외교관으로 중국에 갔던 정두원鄭斗源(1581~1642)에 의하여 《천문서天文書》, 《직방외기職方外紀》,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천문도天文圖》, 서양 대포를 만드는 방법을 정리한 자료인 《홍이포제본紅夷砲題本》등의 책과 함께 서양인 선교사 로드리게스에게 천리경을 받아왔다고 한다.











김정희 초상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북한산 정상에 있던 오래된 비석을 찾아간 것은 31세 때였다. 이전에 이 비석은 무학대사無學大師와 관련된 비석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중 1816년 7월 어느 날 김정희는 친구인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북한산에 있는 승가사僧伽寺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산봉우리 꼭대기의 비석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 입각하여 비문에 새겨진 68자를 해독하였다. 그 다음해에도 김정희는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올라가 비문을 해독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비석이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새롭게 신라의 영토에 편입된 한강 지역을 돌아보고 세운 순수비였음을 밝혀냈다. 이때 추사의 기쁨은 어떠했을까?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이다. 1816년[丙子] 7월 김정희金正喜와 김경연金敬淵이 와서 읽어보았다. 1817년[丁丑]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趙寅永이 와서 상세하게 살펴보았는데, 남아 있는 글자殘字가 68자였다.”


북한산순수비에는 진흥왕이 영토를 넓힌 내용과 북한산을 순수할 때 수행하였던 신하들의 관등 및 관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1줄에 32자씩, 12줄에 모두 384개 글자가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다. 신라 때의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발견은 우리나라 금석학의 일대 성과로서 실사구시의 정신이 반영된 구체적인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박지원 초상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의 아들인 박종채가 회상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큰 키에 살이 쪄 몸집이 매우 크셨습니다.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 뼈가 불거져 나오고, 눈은 쌍꺼풀이 져 계셨습니다. 또 목소리는 매우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밖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준엄한 표정을 지으면 큰 몸집과 어우러져 좌 중을 늘 압도하곤 했습니다.”


박지원의 초상화는 그가 살아 있었을 때 이미 그려졌다. 그런데 그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본래 모습에 10분의 7도 미치지 못하니 없애버려라”라고 하는 말에 따라 버렸다고 한다. 이후 그의 초상은 당분간 그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이 초상화는 손자인 박주수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20세기 초에 후손들의 증언으로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박지원의 얼굴이다.





조선시대의 상인들이 썼던 도장, 보부상인장褓負商印章

제작연도/ 19세기 말 ~ 20세기 초
작가(출처)/ 보부상
현대사회는 전국적으로 도로가 잘 연결되어 있고, 자동차․열차․배․비행기 등의 운송수단이 발달하여 해외와의 무역은 물론 국내의 유통업도 활발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까? 그때는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상인 단체가 있었다.
보부상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던 전문 상인이었다. 원래는 보따리장수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수인 부상負商, 2개의 상단으로 운영되었다. 이 도장들은 보부상 조직의 일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손으로 하는 싸인보다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어 상업 활동이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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