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경복궁 근정문(勤政門)과 근정전(勤政殿)

浮石 2019. 4. 29. 06:00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서 근정전과 함께 고종 4년(1867)에 건립되었다.
근정문은 정면 3칸, 측변 2칸의 중층() 누문()으로서 다포계() 양식의 우진각 지붕건물로 세부 수법은 근정전과 큰 차이가 없다.


경복궁 근정전 (景福宮 勤政殿) 국보223호

1395년 경복궁을 지을 때 함께 지어졌으며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로, 대한민국에서 궁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근정전이라는 이름은 정도전이 《서경》(書經)의 구절을 이용하며 왕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勤) 잘 다스려진다(政)"는 뜻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1395년(태조 4년) 건설되었는데 지붕이 용 문양이 새겨진 청자 기와들이 덮여 있어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후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그의 아들 광해군이 복원 시도를 했었는데 이때 값비싼 청자 기와로 복원하려 해 많은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후 1867년(고종 4년) 중건하였으며, 고종이 근정전에서 공식적으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에 대한 사면을 반포하였다.
일제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으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2019년 현재 볼 수 있는 근정전의 모습은 2000년대 초 대대적인 보수와 수리를 거친 모습이다.  

근정전의 이름에 얽힌 사연도 흥미롭다. 근정전의 이름을 처음 지은 인물은 경복궁 건설의 주역 정도전이었다. ‘근정()’이란 부지런하게 정치하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나라를 통솔하는 자에게는 부지런함이 요구되었다. 이는 [서경()]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하고, 문왕()이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하며,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하였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정도전 역시 편안히 쉬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기 때문에, 왕은 무릇 부지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도전이 모든 일에 부지런해야 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할 바’를 알아서 부지런히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왕이 부지런히 해야 할 것으로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왕이 부지런히 할 바를 알고 부지런해야 했던 곳 근정전, 근정전은 조선 정궁의 정전답게 이곳에서는 수많은 의식과 행사, 그리고 역사를 흔든 사건이 있었다. 근정전에서 행해진 대표적인 의식은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 의식과 역대 왕의 즉위식이었다.

중종 때 편찬이 완료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 부분에는 ‘근정전은 조하()를 받는 정전이다. 남쪽을 근정문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홍례문(:홍례문은 나중에 흥례문으로 바뀜)이라 하며, 동쪽을 일화문(), 서쪽을 월화문()이라 한다.’고 하여 근정전의 주요 기능이 조하를 받음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경복궁이 조선전기에만 정궁으로 기능을 한 만큼 이곳에서의 즉위식을 거행한 왕은 정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의 7명으로 확인된다. 첫 왕인 태조는 개성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고, 태종 역시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태종이 상왕으로 올라가면서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즉위식이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즉위식을 제외하면 근정전에서 행해진 대부분의 즉위식은 슬픈 즉위식이었다. 선왕이 승하한 후 장례 의식이 엄수되었기 때문이었다.


근정전에서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면서 다례()와 불꽃놀이를 행하기도 했으며, 근정전 앞에서는 과거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했다.

세종 때에는 생원, 진사시를 실시한 후 근정전에서 방()을 발표하고, 생원 진사의 백패()를 나누어 주었다. 세종이 문과 시험의 책문()을 낸 곳도 근정전이었다. 1519년(중종 14) 중종 역시 근정전에서 친히 책문을 냈는데, 당시 출제 문제는 ‘요순의 도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으며, 응시자는 120명이었다.


근정전에서는 이벤트성 행사도 벌어졌다. [태종실록]에는 ‘사신을 근정전에서 연회()하였다. 왕이 태평관에 가서 청하여 사신을 경복궁에 맞이하고 안마()를 주었다. 이어서 근정전에서 연회를 베풀고, 군기감에 명하여 불꽃놀이의 기구를 근정문 바깥뜰에 설치하고, 저녁이 되어 연회를 파하고 사신과 더불어 근정문에 나아가서 불꽃놀이를 구경하였다. 화염이 하늘에 치솟고 폭음이 궁정을 뒤흔드니, 사신과 두목() 등이 심히 기이하게 여겨 찬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1418년(태종 18) 1월 1일)고 기록하여 근정전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해 불꽃놀이를 했음이 나타난다.


[세종실록]에는 ‘명나라 사신 창성()이 대궐에 들어오니, 근정전으로 맞아들이고 다례()를 행하였다.’(1430년 12월 14일)는 기록이 보인다.

[세종실록]에는 근정전의 화재 예방에 관한 자료도 보인다. “승정원에게 전지하기를, ‘근정전이 높아서 만일 화재가 있다면 창졸간에 오르기가 어려울 것이니, 쇠고리를 연쇄()하여 처마 아래로 늘여 놓았다가, 화재가 있으면 이를 잡고 오르내리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또 옥상이 위험하여 불을 잡으려던 자가 미끄러질 경우 잡을 만한 물건이 없으니, 역시 긴 쇠고리를 만들어서 옥상에 가로 쳐 놓는 것이 어떤가. 총제 이천과 더불어 이를 의논하여 아뢰라,’하니, 이천 등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실로 지당하옵니다.’하므로, 드디어 선공감에 명하여 근정전·경회루·사정전·문무루·인정전·광연루·모화관에 사용할 쇠고리를 만들어 바치게 하였다.” (1431년(세종 13) 1월 2일)

궁궐에 화재가 일어났을 때를 대비하여 근정전 등 주요 건물에 쇠고리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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