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허난설헌 묘

浮石 2007. 2. 3. 11:01

 

 

 

 

 

 

 

허난설헌묘 :  경기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허난설헌은 사임당과 반대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으로 인해 불행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27살에 죽기까 지 길지 않은 삶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짧은 삶도 별달리 행복하지 못했다. 허난설헌의 시적 재능은 중국과 일본에 까지 알려져 그곳에서 시집이 출간될 만큼 뛰어났지만, 그녀의 재능은 그녀에게 행복을 선물하지는 않았다.

허난설헌은 대대로 명망있는 양천 허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부제학까지 지낸 학자였다. 그녀의 형제인 허성. 허봉. 허균은 당대의 문장가들이었고 그 가운데서도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은 조선의 기재이며 선각자였다.

여성에게 문인적 고급교양을 차단했던 시대라 아버지 허엽은 딸 허난설헌에게 글을 그르치려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의 오빠들이 공부하는 곳에 가서 어깨 너머로만 배울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지어 여신 동으로 불렸을 만큼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발군의 시적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요즘으로서는 어린 나이인 15세에 명문 안동 김씨의 김성립과 혼인했다. 남편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 슬이 승지에까지 이른 인물이기는 하나 아내 허난설헌에 비하면 뒤처지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이를 알려주는 재미있 는 일화가 전한다. 남편의 친구 송도남이란 사람이 늘 남편을 찾아와서 부를 때에,

"멍성립이 덕성립이 김성립이 있느냐?"

라고 놀려댔다. 이럴 때마다 남편은 한마디 대꾸를 못했다. 매번 절절 매는 남편에게 허난설헌은 응수할 말을 가르 쳐주었다.

"오, 귀뚜라미 매두라미 송도남이 왔구나!"
김성립이 이렇게 응수하니 송도남은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에게서 배운 모양이군."

허난설헌과 금실이 좋지 못했던 남편은 자주 외도를 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 대 해서 경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게다가 아들과 딸을 잃고 배 안에 들었던 아이마저 유산하는 불행 이 거듭되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친정의 옥사가 있었다.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에 관련된 당쟁에 휩싸여 귀양을
가게 되었고, 허난설헌보다 먼저 죽었다. 또 동생 허균의 모반사건이 터지면서 친정은 멸문의 화를 입었다. 세 자식 의 요절, 친정의 멸문, 남편의 외도 등으로 생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초당에 박혀 책만 읽다가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난설헌은 여선(女仙)으로 불릴 만큼 신선사상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여도선(女道仙)으로 자처하기도 했다. 그의 시 213수 중에서 신선시가 128수나 된다. 자신을 갑갑하게 하는 현실, 특히 당시의 조선적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 시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시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또 허균의 모반으로 친정이 멸문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시는 출간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앞서 허균이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을 전해준 일이 있었다. 주지번은 허난설헌의 시에 감탄하여 명나라로 돌아가서 '난설헌집'으로 출간했다. 이 시집은 중국의
문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중국에서 허난설헌의 명성이 높아지자 조선에서도 허난설헌에게 주목했고, 이후 조선 최고 의 여류시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아버지 밑에서 타고난 총명함으로 시적 재능을 갈고 닦았으나 조혼의 풍습으로 일찌 감치 시집가야 했고, 남편과의 금실도 좋지 못했던 허난설헌은 재주 있어 불행했던 조선여인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조선은 탈출구가 없던 시대였고 사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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