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이포리(梨浦里)

浮石 2007. 1. 27. 09:57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전경

 

ㆍ이포리(梨浦里) (구전자:최병두 78세)- 이포리는 본래 여주군 금사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세곡과 물화를 싣고 풀던 큰 나루터였으며, 이곳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배나무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배나무 이(梨)자와 물가 포(浦)자를 합쳐 이곳을 이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는 배개나루, 배나루, 배개 또는 이포진으로 불리우기도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구말, 천양, 근정리, 서원, 뒷골이 병합되어 이포리를 이루게 되었다.
현재는 법정리로 분리하여 수구말, 큰말을 1리로, 근정리, 뒷골, 서원을 2리로 나누고 있다.
※이포(梨浦)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1914년 이후이고 원래는 이호(梨湖)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문헌에 이호(梨湖)로 표기된 것을 자칫 강천면 이호리로 착각하기 쉽다.
강천면 이호(梨湖)의 원래 지명은 배미(梨山)이다. 배는 산(山)을 뜻하는 것인데 한자로 쓰면서 배이(梨)자를 쓰게 되어 유래나 전설에 엉뚱한 배(梨)나 배(舟 나룻배) 등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
이곳을 배개(산(山)+나루(津)=배갯나루(山 가생이 나루라는 뜻)라고 부르고 또는 배나루(山 가생이 나루라는 뜻)를 배나루(梨津), 배개(山)의 뜻을 이포(梨浦)라고 쓰게 된 것이다.
이곳은 옛날 천령(川寧)이 여주로 병합되기 이전 고려 때부터 묵객들의 저서에 으레 시 몇 수식은 올라 있는 곳이다.
다른 지방의 이름 중에 배(梨,舟)자가 붙은 지명이 무수하게 많다.
배말(梨村), 배내(梨川), 배고개(州峴), 배미(梨山), 배안말(村), 배골(舟谷), 배꼬지(梨花), 배다리(舟洞), 배내고개(舟峴)등 이러한 지명은 모두 산(山)과 관계된 지명인데 이(梨)주(舟)자를 붙인 것이다.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의 시 이호(梨湖)에서 양화(煬花)로 거슬러가면서, 동정 염흥방시 「침류정 사절」, 둔촌 이집의 시, 목은 이색의 시, 백운거사 이규보, 가정이곡, 척약재 김구용외 많은 명인들의 시에 모두 이포(梨逋)가 아니고 이호(梨湖)라고 썼다.
나루터면 으레 모래틉(백사장)변이기 마련인데 배자가 붙은 나루터는 배가 바로산(山)에 닿게 되는 곳이다.
ㆍ개터 (구전자:조계득외 2명84세)- 이포국민학교앞 갯가에 있는 들
※개(逋)=강이나 바다에 물이 드나드는 곳
ㆍ곰바위(구전자:이준상외 2명 79세)- 이포리 다리 근처에 있는 곰처럼 생긴 바위
ㆍ곰부리(구전자:조계득 84세)-이포리 다리 근처에 있는 모롱이
※곰(큰)+부리(부랭이, 모퉁이)
ㆍ근정리(近汀里)(구전자:이준상외 2명 67세)-천양 남쪽에 있는 마을로 현재 금사 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 ※汀=물가정
ㆍ근정리 고개(近汀里)(구전자:이준상외2명 79세)- 근정리 북쪽에 있는 고개로 현재 지서 앞쪽으로 천양마을과 이어지고 있다.
ㆍ기천서원(沂川書院)→모현사
ㆍ김안국 재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모재 김안국을 추향하는 사당
ㆍ대촌(大忖)→큰말
ㆍ뒷골(구전자:조계득 84세, 이준상 79세)- 기천서원 뒤쪽에 있는 마을
ㆍ뒷굴→뒷골
ㆍ뒷-능(구전자:이공희 67세) 수분촌 뒤쪽에 있는 산
※능(陵)=왕능의 뜻이 아니고 산능선이라는 뜻
ㆍ마상끝- 이포리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말을 놓아 먹였던 곳이라고 함.
※마(큰)+상(산)골(谷)
ㆍ말방다리(구전자:최병두 78세)- 이포리 뒷골에 있는 산으로 병자호란 때 홍명구(洪命구)가 금화(金化)에서 전사하였는데, 말이 그 시체의 머리를 물고 이곳까지 왔다고 함,
※말(큰)+방(귀퉁이)+다리(들)+산(큰모리 고래의 산)
ㆍ모현사(慕賢祠)-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산 15의 2번지에 있다.
처음에는 마암서원이라 하였는데 조선 선조 13년(1580)에 건축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세워서 인조 3년(1625)에 기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그후 화재로 인하여 터먼 남아 있었던 것을 1877년 4월 김영진씨가 사재를 기울이고 99인의 기금으로 다시 세워 모현사라 하고 문간공(文簡公)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외 7인의 명현을 봉안했으며, 봄, 가을로 제향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옛 명현의 덕을 추모하게 하는 곳이다.
모현사의 현판은 서은(西隱) 장홍식(張鴻植)이 새겼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재향은 올리는 명현은 다음과 같다.
문경공(文敬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충공(文忠公) 오리(悟里) 이원익(李元翼)
증영의정(贈領議政) 치제(恥濟) 홍인우(洪仁祐)
문숙공(文潚公) 수몽(守夢) 정엽(鄭燁)
문정공(文靖公) 택당(擇堂) 이식(李植)
충열공(忠列公) 나재(懶齋) 홍명구(洪命?)
문간공(文簡公)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ㆍ묘련암(妙蓮庵)- 이포리 수구말 뒤에 있는 암자로 원래의 암자는 폐사되었다.
ㆍ박석고개(구전자:조계득외 2명 84세)- 천양마을 북쪽에 있는 고개로 마을 뒤쪽 새로난 길과 이어진다.
※ 박(받 山)+석(새間)
ㆍ배개→이포리(구전자:최병두 78세)
ㆍ배개나루→이포리
ㆍ배나루→이포리
ㆍ범사정(泛亭)-금사면 이포리에 세워졌던 정자로 모재 김안국이 벼슬에서 물러나 금사면 이포리에 은거할 때 세워진 건물로 지금은 훼철되었다.
ㆍ벼락바위(구전자:이공희외 2명 67세)- 이포 근정리에 있는 바위로 벼락을 맞았던 바위라 하여 벼락바위로 불리우며, 바위가 강 쪽으로 돌출되어 강물이 굽이쳐 흐르며 물살이 빨라 옛 날 이곳을 왕래하던 배들이 종종 부딪쳐서 침몰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벼락은 벼랑의 뜻
ㆍ비석거리→비선거리(구전자:최병두 78세)
ㆍ비선거리-이포리 뒷골에 있는 들, 남양 홍씨인 영의정, 홍순목(洪淳穆) 신도비(神道碑)가 있는 들
ㆍ삼성당(三僊-堂; 여주군지에는 삼선당(三仙堂)으로 표기됨) (구전자:최병두78세)- 금사면 이포리 192번지인 서원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에 세워진 것은 고려말기라고 전해지며 동민을 안녕케하는 수호신으로 모시는 최씨부부와 그의 묘소를 잡아준 나옹선사 및 산신을 제사하는 당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협소한 초옥이었던 것을 주민 오도성이 세웠다가 다시 기와집으로 3칸을 세운 것이 1728년 무신정변 때 소실되었고, 다시 주민이 협력하여 3칸을 새로 세워 1칸은 영정을 봉인하고 2칸은 비워두고 있다.
이 삼선당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고려말기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영원사로 옮길 때, 수로 뱃길을 이용하려고 배를 구하고자 하자, 최씨가 자기 배에 나옹을 태우고 뱃길을 가는데 배가 바람에 날리듯이 질주하여 최씨가 자세히 보니 청룡과 황룡이 배 밑에서 밀고 끌고 하여 화살처럼 질주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옹선사는 최씨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소원을 물으니 최씨가 일광지를 부탁함에 그 묘자리를 일러주고 먼 훗날 이곳에서 차마 소리가 들리면 후손들이 모두 이곳을 떠나게 된다고 하였는데 약 60년 전에 그 최씨 후손들이 최수만 한사람만 남고 모두 떠났다고 한다.
현재 삼선당 아래 강변의 은행나무는 당시 나옹선사가 지팡이를 심고 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ㆍ새뫼→새매 ※새(가운데 사이)+뫼(山)
※새매앞- 수부촌 뒤쪽의 태봉 밑에 있는 산등성이
ㆍ새터 (구전자:조계득외 2명 84세)- 서원 서남쪽에 새로된 마을
ㆍ서원(書院) (구전자:이준상외 2명 79세)
천양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기천서원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
ㆍ성선암(聖禪庵)(구전자:최병두 78세)- 천양 동북쪽에 있는 절로 조씨 문중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ㆍ소탱이굼치(구전자:조계득외 2명 84세)- 큰말(천양)앞에 있는 빨래터로 소가 져 있다고 함.
※ 소탱이= 소댕이, 소덩이(沼가 있는 목)
ㆍ수부촌(水夫村)- 뒷굴 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울에 갇혀 있는 외딴 마을이다.
이 마을의 유래는 아주 먼 옛날 남한강에서 배를 타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수부 말이라고 불리웠으며 또는 수부촌 수구 말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현재 산 아래쪽 마을을 아랫말, 위쪽, 마을을 웃말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고 있으며 이포대교가 마을 앞쪽에 위치하여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ㆍ수구말→수부촌 ※수(물 水)+구지(곶이 튀어나온 곳)=수구지→수곶이 →수구
ㆍ수부말→수부촌
ㆍ술천성지(述川城址) (구전자:최병두 78세)- 금사면 외평리와 이포리 사이에 태봉이라고 부르는 해발 285미터의 산에 있다.
이 성지가 있는 지역은 여주와 병합되기 전에 천령현 구역인데, 이곳은 당초 고구려에서 술천군(성지매)이라고 불렀다. 이후
신라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여기에 술천성을 쌓고 고구려의 세력을 추방하는 전초기지로 사용해 왔다.
한편 백재가 660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된 후 유민들의 반항이 치열했으나 무산되고 663년 고구려 보장왕 때 고구려의 장수 뇌음신이 말갈의 장수 생해와 합세하여 공방전이 생겼으나 신라는 끝내 술천성을 사수하였다.
그 맞은편 대신면 천서리 뒷산에 있는 파사성과는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충분히 교전이 이루어 진 거리라 하겠다.
현재는 산 정상에 토성의 흔적과 일부는 석축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 둘레가 커 보인다.
특히 삼국사기에 여주지방의 지명이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한 역사적 의의가 큰 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ㆍ아랫말 (구전자:이준상외 2명 79세)- 수부말 아래쪽의 마을
ㆍ아랫벌 (구전자:이공희 67세)- 천양 아래쪽에 있는 들
ㆍ여수고개 (구전자:이준상외 2명 79세)- 이포리 수분촌에서 외평리로 넘어가는 산길로 옛날 고개 근처에 여우가 많이 나타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수(느린머리)→너수→여수
ㆍ옻물터 (구전자:조계득외 2명84세)- 이포리 수부말에 있는 약물터로 약수가 옻 오른데에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ㆍ우렁바위- 이포 천양마을에서 이포대교로 가는 길 아래 강에 있는 바위로서, 강물이 많을 때면 물에 잠겼다가 강물이 적을 때에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우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우렁= 울림
ㆍ웃말- 수부말 위쪽의 마을
ㆍ육우당(六友堂) (구전자:최병두78세)- 고려 공민왕때의 학자 김구용(1338-1384)이 우거하던 곳이다.
그는 고려와 명나라의 국교가 난관에 봉착하자 행례사(시신)로 명나라에 들어가다가 요동에서 체포되어 남경으로 압송, 명제의 명령으로 대리로 귀양을 갔다가 여주 영녕현으로 와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먼저 친명파로 북원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로 유배된 바 있었다.
석방된 후에 여주 외가에 있으면서 천령에 당을 지었는데 처음에 설(雪), 월(月), 풍(風), 화(花)로 하여 네가지 벗을 삼아 사우당이라 하였다가 강(江)과 산(山)을 더하여 육우당이라 하고 목은에게 부탁하여 기문을 받았다, 이후 어느 시기에 훼철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ㆍ원촌(院村)→서원(구전자:이준상외2명 79세)
※원(院)=옛날 여관의 역할을 하던 곳
ㆍ은행나무 (구전자:최병두78세)- 삼선당 뒤쪽에 있는 은행나무로 이포리 나루터 위쪽 강변 암석위에 서 있으며 지상에서 2미터까지 썩은 흠이 있고 수목의 상단은 고사(枯死) 되어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높이 35미터, 나무 둘레가 5.8미터로서 고려시대 나옹선서가 이 나무위의 산으로 오르면서 바위틈에 꽂아놓은 것이 자라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는 천령 최씨의 시조 묘와 관련되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나무속에는 귀달린 뱀이 산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을 줄 알아라?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ㆍ이문안(里門) (구전자:이준사외 2명79세)- 천양 북쪽 수부촌 방향에 있는 마을로 과거에 큰 대가집이 있어 문이 마을쪽을 향해 있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그 문밖으로 돌아 다녔다고 한다.
ㆍ이포(梨逋)→이포리 (구전자:최병두 78세)
ㆍ이포나루터(梨逋)- 이포 천양 앞에 있는 나루터로 대신면 천서리로 건너가는 배가 다니는 곳.
ㆍ이포느티나무- 이포리 281번지에 있는 느티나무로 현재 금사 농협 앞쪽 도로변에 있다.
수령(樹令)은 500년, 높이가 20미터, 나무 둘레가 2.8미터로 김창선씨의 소유로 되어있다.
지상 1미터 높이에 태와 같은 둘레가 있으며 수간에 길게 흠이 나있다, 약 500년 전 이씨조선 태조가 무학대사로 하여금 도읍을 선정하라는 명을 받고 이곳에 이르러 강변의 은행나무와 함께 꽂아 놓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ㆍ장터거리 (구전자:이공희외 2명 67세)- 큰말 또는 대-촌으로 부르기도 하며 과거 이포장이 열렸던 곳으로 마을의 중심지였다.
ㆍ절고개 (구전자:이준상외2명 79세)- 수부말에서 외평리 묘련암으로 가는 고개
ㆍ제비다리(구전자:조계득외 2명 84세)- 이포 2리에 속하는 복지회관에서 천양마을로 가는 방향에 있는 다리, 현재는 새 도로가 나있어 없어졌으며 주변에 주유소가 위치하고 있다.
※제비= 좁은
ㆍ차말(次馬)-천양에서 성선암으로 가는 길옆에 있는 빨래터 ※차(찬물)+말(마을)
ㆍ천령(川寧) →천양 (구전자:최병두 78세)
※처음 지명은 성지 매로서 이후 술천, 기천, 천령의 순으로 변했다.
ㆍ천양(川陽, 天陽)- 이포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그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 무열왕 663년에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곳에 술천성을 쌓고 지방군단인 골내근정을 두었고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는 천령현을 두었다는 기록을 보아 천양에는 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 마을을 천양이라고 불리는 것은 천령이 변음되어 천양으로 불리운 것 같다.
ㆍ침벽루(枕碧樓)(구전자:최병두78세)- 이포리 삼선당 옆에 세워진 누각으로 1994년에 세움.
옛날에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에서 남한강을 내다보며 훌륭한 시와 문장을 지었던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목선을 타고 오는 왜병들과 맞서 이곳의 의병들이 싸워 승리를 거둔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이포리에 거주하고 있는 뜻있는 인사들에 이해 과거의 누각터에 새로 세우게 된 것이다.
ㆍ큰말 (구전자:조계득외2명 84세)-대촌, 장터거리라고도 불리우며 천양의 가장 큰 마을로 시장이 있었던 자리
ㆍ탑선대 (구전자:최병두 78세)- 이포장터 뒤쪽 산에 있는 고목아래 탑이 있었던 자리
ㆍ태봉(산)- 수부촌 묘련암 뒷쪽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옛날 왕자의 태를 묻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ㆍ폄차정-금사면 이포리에 있던 정자로 모재 김안국이 벼슬에서 물러나 점동면 원부리에 은거할 때 세워진 것으로 훗날 페허가 되었다.
ㆍ후곡(後谷)→뒷굴 (구전자:조계득외 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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