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寧陵(효종대왕릉)

浮石 2007. 3. 24. 11:01

 

세종대왕릉에서 효종대왕릉으로 가는 길.. 

 

 

 

 

 

□ 소재지 : 능서면 왕대리 산 83-1
□ 시 대 : 조선
□ 지정사항 : 사적 제195호
녕릉(寧陵)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孝宗)과 그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쌍릉(雙陵)이다. 1659년(효종 10)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능선에 병풍석을 갖춰 모셨으나, 1673년(현종 14)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영릉(英陵)의 동쪽 홍제동(弘濟洞)으로 천장(遷葬)하였다. 한때 녕릉의 초장지(初葬地)를 송시열이 잘못 선정했다고 반대 정파(政派)가 주장하면서 여러 정치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천릉(遷陵)의 조성시 “왕릉혈(王陵穴)뿐만 아니라 그 아래 혈(穴)도 아주 길(吉)하다”는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주장을 수용하여 같은 구릉의 위쪽에는 왕릉을, 아래쪽에는 왕비릉을 모신 독특한 장법(葬法)을 사용하였다. 이같은 구조를 ‘동원이릉(同原異陵)’이라 할 수 있는데 녕릉표(寧陵表)의 음기(陰記)에는 왕릉을 기준으로 해서 왕비릉을 “부장재하(祔葬在下)”했다고 기록하였다.
녕릉은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의 신능동 산 83-1에 위치한다. 녕릉 입구 우측의 재실(齋室)을 지나 좀 더 걸으면 홍살문이 우뚝 서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 금천교(禁川橋)를 건너면 정자각이 바로 보이는데, 뒤쪽 구릉의 양지 바른 곳에 능침(陵寢)이 자리 잡고 있다. 정자각 오른쪽에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의 녕릉표(寧陵表, 총높이 약 367㎝)가 안치된 비각(碑閣)이 건립되어 있다. 방부(方趺, 높이 94㎝ 폭 186.5㎝ 두께 186.5㎝)를 2단으로 만들고 복련(覆蓮)·당초(唐草)·안상(眼象) 등을 화려하게 조각하여 장중한 느낌을 준다. 이같은 형태의 능표 방부는 조선시대 왕릉중 유일한 것이어서 문화재 가치가 매우 높다. 비신(높이 198㎝ 폭 63.5㎝ 두께 64㎝)의 전면에 이양빙체(李陽氷體)의 큰 전자(篆字)로 “조선국(朝鮮國) 효종대왕(孝宗大王) 녕릉(寧陵)” 이라고 써서 녕릉임을 밝히고 있다. 뒷면에는 표제(表題)를 “녕릉표석(寧陵表石) 음기(陰記)”라 쓴 후, 총 5행의 음기를 단정한 해서(楷書)로 기록하였으나 짓고 쓴 사람은 새기지 않았다. 정확한 건립 연대가 없지만 실록(實錄) 자료를 통해서 1681년(숙종 7)에 입석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왕릉에는 후면에 곡장(曲墻)을 두르고 전면에 2단의 계체석 구조를 갖춘 후, 현종대(顯宗代)에 새로 조성한 석물을 진설(陳設)하였다. 난간석을 설치한 봉분 주위로 석양(높이 108㎝ 폭 71㎝ 두께 171㎝) 2쌍과 석호(높이 113㎝ 폭 68㎝ 두께 194㎝) 2쌍이 수호하고 있으며, 앞쪽에는 상석(높이 50.2㎝ 폭 315㎝ 두께 200.2㎝)과 장명등(총높이 355㎝)이 놓여 있다. 상석은 나어두(羅魚頭)가 조각된 고석(鼓石, 높이 58㎝ 폭 90㎝ 두께 89㎝) 4개가 받치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8각 대석(臺石)을 받친 망주석(총높이 335㎝)이 높이 서 있다. 또한 계체석 사이의 공간에는 복두공복(㡤頭公服)을 착용한 문인석(높이 300㎝ 폭 107㎝ 두께 102㎝) 1쌍과 갑주를 걸치고 길이 181㎝의 장검을 딛고 선 험준한 기상의 무인석(높이 325㎝ 폭 113㎝ 두께 115㎝) 1쌍, 그리고 석마(높이 125㎝ 폭 65㎝ 두께 182㎝) 2쌍이 배열되어 있어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 재위기간의 긴박한 시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실록에 의하면 좌측편의 무인석은 오른쪽 눈을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사실을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왕릉 아래에 자리 잡은 왕비릉의 석물도 거의 동일한 규모와 양식으로 설치되었으나, 곡장이 없다는 점이 왕릉과 다르다.
한편 효종과 함께 북벌을 도모하거나 배청(排淸)에 적극 가담하던 신하들의 묘와 유적이 여주에 상당수가 남아 있어 주목된다. 우선 효종 때 훈련대장이 되어 신무기의 제조와 성곽의 신축 등을 진두지휘했던 정익공(貞翼公) 이완(李浣, 1602~1674)의 묘가 여주읍 상거리에 있으며, 효종의 신임이 두터워 왕과 북벌을 적극 추진하였던 기천(沂川) 홍명하(洪命夏, 1607~1667)와 탄수(灘叟) 원두표(元斗杓, 1593~1664)의 묘가 각각 흥천면 문장리와 북내면 장암리에 있다. 또한 병자호란 발발시 의병을 모집하여 결사항전했던 송국준(宋國準, 1588~1651)의 묘가 대신면 하림리에 있고, 배청파(排淸派)로 청(淸)의 심양(瀋陽)에 끌려 가 모진 고초를 겪었지만 끝내 절의(節義)를 굽히지 않았던 회곡(晦谷) 조한영(曺漢英, 1608~1670)의 묘가 대신면 장풍리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들은 죽어서도 효종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북벌의 중심인물이었던 우암 송시열도 살아생전에 여주에 들릴 때마다 강변의 청심루(淸心樓)에 머물고 효종의 능을 바라보면서 비통해 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북벌의 대의(大義)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때 송시열은 녕릉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달이 잠기도록 앉아 있으니 녕릉의 잣나무는 컴컴한데, 어디에 꿇어 앉아 아뢸지 알 수 없네(坐久月沈陵栢暗 不知何處跪陳辭)”라는 절창(絶唱)을 읊었는데,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愛誦)되었다. 그래서 정조는 송시열의 이같은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1785년(정조 9) 여주 강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대로사(大老祠)를 세운 후 곧 바로 사액(賜額)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1787년(정조 11) 송시열이 태어나서 세 번째 맞는 회갑년(回甲年)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친히 비문을 짓고 쓴 다음 장대한 규모(총높이 약 390㎝)의 대로사비(大老祠碑)를 조성하여 송시열이 여주에 남긴 흔적을 후세에 영원토록 알리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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