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원몽린의 묘

浮石 2007. 4. 6. 10:27

 

효종의 부마인 원몽린 묘 전경. 뒤는 원만리 묘이다

 
 
□ 소재지 : 대신면 상구리
□ 시 대 : 조선
□ 지정사항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9호
원몽린(1648~1674)은 현종대의 인물로 본관은 원주, 자는 용여(龍歟), 호는 죽서(竹西)이다. 원산군(原山君) 원황(元滉, ?~1442)의 후손으로 충익공(忠翼公) 원두표의 손자이자 평안도관찰사 원만리의 아들이다. 1659년(효종 10) 효종의 제5녀인 숙경공주(淑敬公主)와 혼인하여 흥평위(興平尉)에 봉해졌다. 1661년(현종 2) 종1품 광덕대부(光德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1672년(현종 13)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평안도 의주(義州)까지 갔다가 부친상(父親喪)으로 인해 되돌아 왔다. 여러 차례에 걸쳐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묘는 상구리 안말의 뒤쪽에 위치한 원주원씨세장지의 남측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9, 폭 105, 두께 34), 상석(높이 43, 폭 189, 두께 113), 향로석(높이 47, 폭 51, 두께 34), 망주석(높이 156, 폭 38, 두께 38), 문인석(높이 163, 폭 57, 두께 49)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한 문인석은 문양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사각향로석에는 복련을 장식하였다. 또 망주석의 상단에는 운각(雲角)과 염우(廉隅)를, 주신에는 다람쥐를 새겼는데, 좌우 모두 위로 향하게 한 점이 특이하다. 봉분 앞에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169)가 세워져 있다. 비신(높이 131, 폭 61, 두께 20)의 전면에 촉체(蜀體)로 유려하게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성록대부(成祿大夫) 흥평위(興平尉) 원공몽린용여지묘(元公夢鱗龍歟之墓) 숙경공주(淑敬公主) 부좌(祔左)”라 써 놓아 부부 합장묘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삼면에는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았다. 원형의 호석을 두른 봉분의 주위에 곡장을 설치하고 뒤쪽에 계단을 놓아, 바로 위에 모신 아버지 원만리의 묘소에 쉽게 오르도록 하였다.
묘역 아래에 방부개석 양식의 신도비(총 높이 277)가 건립되어 있다. 백대리석의 비신(높이 186, 폭 71, 두께 41)에 영의정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이 지은 비문을,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중국 진(晋)나라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로 짜집기하였다(集晋王羲之書). 그리고 “흥평위(興平尉) 효헌(孝憲) 원공(元公) 신도비명(神道碑銘)”이라 올린 전액도 중국 당(唐)의 이양빙(李陽氷) 전서(篆書)로 집자하였고, 비신의 뒷면에 아들 원경하가 지은 추기(追記) 역시 당(唐)나라 유공권(柳公權)의 해서를 모아 각자하였다(集唐柳公權書). 비제는 “유명조선(有明朝鮮) 성록대부(成祿大夫) 흥평위(興平尉) 증(贈) □ 덕대부(德大夫) □ □ □ 원공(元公)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이고,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신사(三辛巳, 1761, 영조 37) 중춘각(仲春刻)”이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의 서예사에도 큰 영향을 끼친, 중국 명필 3인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원몽린 신도비는 매우 희귀하여 귀중한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비신 앞쪽의 글씨가 일부 마모되었지만 전반적인
상태는 양호하다.

 

 

중국 명필들의 글씨로 새겨진 원몽린 신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