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소래포구

浮石 2008. 1. 10. 13:50

 

 

 

 

 

 

 

 

 

 

 

인천시 논현동의 소래포구의 소래(蘇萊)는 원래 신라시대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왔다(萊)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소래포구가 생기게된 유래는 1930년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천일염(天日鹽 )을 일제가 수탈하기위한 수단으로 수인선 철도를 건설하면서 작업하는 인부들과 염부꾼(염전에서 일하는 사람)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나룻배 1척을 최초로 소래포구에 정착하기 시작한 배경이었으며, 그 후 1960년대초 실향민 6가구 17명어업인이 (어촌계구성) 전마선으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면서 돼지그물, 지금의 연안낭장망 어업에 범선(돛단배)을 이용하여 아주 가까운 바다에 나가 새우젓잡이를 하여 머리에 이고, 지고, 인천, 부평, 서울등지로 나가 팔아 오다가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무동력선을 동력선으로 개량하였으며, 그 때부터 어선수도 차츰늘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수인선을 이용하여 수원, 인천등지에서 상인들이 몰려오고 일반소비자들이 구경삼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직접거래가 활발이 이 루어지면서 물량장 및 선착장, 공판장을 조성하였으며, 많은 예산이드 나 예산이 없어 돌과 모래, 흙을 섬에서 배에 가득 실어다가 어린이에 서부터 어른까지 총동원되어 포구기반시설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 때 부터 주변에 튀김집, 횟집이 하나 둘씩 생겨 나오며 소래어촌계가 중 심이 되어 관광객 유치에 앞장서 80년대 초반 각종 시설물 확충과 더 불어 각 TV 방송사에서 홍보용 방송은 물론 어촌에 관계된 프로, 연 속극등이 방영되면서 점차로 관광객이 해마다 늘어나 이곳을 찾는 사 람들과 선주 아주머니들의 넉넉한 인심이 외래객들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것입니다.

우리네 어촌인심이 돈주고 사느것도 있지만, 어지간한 생선은 그냥 (덤)주기도 하고, 잡어속에서 줍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가 있었던 것이 도시민이 소래포구를 찾는것중 하나이며, 점점 소래포구가 발전되고 살기좋은 고장으로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 타지방에서 맨손으로 올라와 어민만 사용토록된 물량장에서 생선장사를 억척스럽게하여 지금 다들 거부가 되어 이제는 어엿한 소래포구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며, 시집 가서 잘못되면 모두가 친정동네인 소래로 다시와서 재기한 사람도 많 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소래포구를 어시장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전의 소래포구는 진흙탕 갯벌속에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없 이는 못사는 달동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1Km 밖 오봉산 자락 우 물에서 뱃사공들이 선주 아낙네들에게 잘보이려고 물길어 나르던 곳...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에서 새벽밥지어 뱃사공 점심도시락을 차 리던 어촌이었습니다.

그러던 소래포구가 80년대 대단위 관광어촌으로 발전하게되어 오늘 에는 일일 수천명에서 주말, 공휴일, 사리때(고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시기)면 3만 - 5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입니다. 소래포구는 천연적인 포구입니다. 폭이 100M 남짓한 갯골을 따라 썰 물때면 바닥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서해 간마의 차가 최고 9M로 동해, 남해 에서는 보기드문 현상이며, 밀물때가되면 물따라 배가 들어오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찾아보기 드문 신비한 천연포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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