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平,旌 이야기

제주도를 가려고 영월부터 들렀네

浮石 2008. 9. 7. 10:53
[한겨레] [매거진 esc] 노동효의 아웃 오브 서울 1

88지방도로에서 만난 괴골 마을의 초현실적 풍경

< 길 위의 칸타빌레 > 의 저자 노동효씨가 서울에서 제주까지 늦여름을 여행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가장 빠른 길인 하늘길을 이용하지 않고 강원도 산골과 동해안의 해안도로와 남해안의 섬을 둘러가는 길을 택합니다. 길을 끝낸 노씨가 보내올 여행기는 제주까지 이르는 '온 더 로드'의 기록입니다. 대한민국의 길들이 뿜어내는 향취에 취해 보세요. 편집자

미니홈피, 블로그 등 1인 미디어 시대가 도래한 이래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싶다'라는 보조형용사다. 저도 읽고 싶네요, 저도 보고 싶네요, 저도 먹고 싶네요, 저도 가고 싶네요. 다종다양한 '싶다'들이 코멘트 난에 포도송이처럼 매달린다. 그러나 수많은 '싶다'들의 차후 향방을 살펴보면 '실행'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서서히 혹은 곧 사멸해 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중에 생존율이 가장 낮은 '싶다'는 '떠나고/가고 싶다'이다. 비록 그것들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는 아닐지라도 사멸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싶다'가 '실행'으로 진화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가지 정치·경제·문화·사회적 배경이 존재하겠지만 - 실행 단계로 넘어서는 데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선사(禪師)가 남겨준 묘약 몇 방울을 드리겠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여덟 방울이면 충분하다. 똑. 똑. 똑. 똑. 똑. 똑. 똑. 똑.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金 更無時節) 바로 지금, 다시 시절은 없다.
서울~제주 가장 빠른 하늘길은 포기하다

얼마 전 나는 티브이 브라운관을 통해 말을 타고 몽골 초원을 달려가는 유목민을 목격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과 지평선을 향해 말 타고 여행하는 것은 기막힌 기분일 거야. 나는 < 아웃 오브 아프리카 > 의 데니스처럼 소리쳤다. It must be feel amazing! 근데 나는 말이라곤 타본 적이 없다. "여보세요, R입니다. 일하는 동안 말도 탈 수 있나요?" 승마목장은 제주도 중산간 해발 600미터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뙤약볕의 들판에서 하루 20~30킬로미터를 걷거나 달려야 하는 12~13시간의 육체노동, 대한민국 최저임금. 아무렴 말들과 어울려 지낼 수만 있다면! 좋아요, 일주일 뒤 내려갈게요.

서울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가장 단순하고 빠른 길은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공항에 내리는 항로. 그러나 육지를 떠나기 전에 내륙의 길들이 뿜어내는 로드 페로몬(Road Pheromone)을 한껏 들이마신 뒤 부산항에서 제주도로 건너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렇게 하여 < 아웃 오브 서울 > (Out of Seoul)은 시작되었다. "이번주 수요일쯤 출발하는 게 어때?" 직장을 관두고 귀농 준비 중인 K도, 나 홀로 음반사를 운영 중인 L형도 흔쾌히 승낙을 했다. 세 사람의 동행.

서울을 떠나던 날은 구름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뭉개버릴 기세로 정말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검은 양복 차림의 스미스(영화 < 매트릭스 > 에서 무한 복제된 스미스는 대도시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거리를 오가는 직장인들을 연상시킨다. 차이점은 영화 속의 스미스는 스스로 복제를 하지만 현실의 스미스는 시스템에 의해 복제된다는 것이다.)는 뭉게구름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바람을 따라 틀(形)을 변화시켜 가며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복사기 앞에 서 있거나, 계단으로 연결된 비상구 한구석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푸른 하늘에서 일고 있는 뭉게구름 대신 그의 머릿속에선 새로 구입한 자동차 할부금과 아파트 융자금과 결제받을 서류들이 뒤엉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지도 모르겠다.

"R, 여기서 88번 지방도로 빠지자."
스미스의 세계에서 탈출해 귀농을 준비 중인 K가 보조석에서 소리쳤다. 원주를 지나 신림톨게이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빠져나가자 초록의 샛길이 펼쳐졌다. 88번 지방도는 강원도 영월의 황둔천을 끼고 굽이굽이를 틀며 서쪽으로 이어지다가 주천을 만난다. 술 주(酒) 자에 내 천(川). 오랜 옛날 술이 샘솟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양반이 마시면 청주가 되고, 천민이 마시면 탁주가 되었다지. 그러나 탁주면 또 어떠한가? 이태백은 독작(獨酌)이란 시에서 읊기를, 청주는 성인(聖人)에 비유되고, 탁주는 현인(賢人)과 같다고 했으니. 신분이야 천민이되 현인이면 그뿐.

SF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괴이한 동굴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주성이 하늘에 있지 않았으리라.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땅에 주천이 없어야 하리라.
중국의 이태백이 강원도 영월군 술빛고을, 주천을 읊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영월은 청주든 탁주든 술을 사랑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지방, 김삿갓계곡, 청령포, 고씨동굴, 동강과 서강. 서강의 상류가 주천강이라지. 우리는 지방도도 버리고 주천2교 옆으로 난 비포장 길로 들어섰다. 주천강을 따라가자. 길옆으론 민간 유적발굴단이 하얗고 파란 테두리선을 그으며 철기시대의 유물을 발굴 중이었다. 부디 피와 비명이 묻은 창·칼·방패 따위보다는 술과 웃음이 묻은 잔이나 접시들이 더 많이 발굴되기를! 실핏줄처럼 이어지는 길을 시속 20킬로미터로 슬금슬금 내려가는 사이 보조석에 앉은 K도, 뒷좌석에 앉은 L형도 주천강변의 풍광에 취해 가고 있었다. 어쩜 주천읍에 잠시 들러서 사온 캔맥주에 취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다시 길은 88번 지방도로 이어졌고, 상어주유소를 만났다. 민물고기인 숭어나 은어도 아닌 상어가 이 주유소의 이름이 된 까닭이 대체 뭘까? 혹시 주유소 주인이 스티븐 스필버그 광팬? 상어주유소를 지나며 길의 꼬리는 좌우로 휠 뿐만 아니라 낙차 큰 커브를 그리며 높낮이로 꿈틀거렸다. 그리고 펼쳐지는 평창강변의 절경들. 강은 모래톱을 일궈내며 굽이치고, 깎아지른 절벽은 초록의 옷을 벗어던지며 강과 만나 하얀 발목을 내밀고.

괴골마을에 들어선 것은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한반도 지형 선암마을 이정표가 있기에 따라가다가 만난 이상야릇한 지명. 괴골마을. 대체 뭐가 괴상하기에 마을 이름이 괴골이란 말인가? 핸들을 돌렸다. 확인해 보자! 내리막길의 끝은 괴골마을 중심부를 지나 강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마주친 괴이한 동굴. 강의 맞은편 움푹 들어간 두 개의 동굴은 마치 거인의 눈동자처럼 보였는데, 그래서 땅에서 솟아오르던 거인이 머리만 내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잖아! K도, L형도, 나도 현실 속에 등장한 에스에프(SF) 애니메이션 같은 풍경 앞에서 멈칫했다.

나는 동굴을 마주보며 강기슭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강변에는 뻐꾸기시계 하나가 12시를 가리키며 기슭에 묻혀 있었다. 그 모습은 초현실주의 그림 속의 풍경 같기도 하고, 시계는 내 꿈속에서 튀어나온 시계 같았다. 시간이 멈추던 순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계 속의 12시는 정오일까, 자정일까?

시간이 멈추던 순간 무슨 일이 있었을까

너무나 오랜 세월을 두고 나는
시계 하나를 꿈꾸어 왔다,
두 개 또는 세 개의 바늘을 가진 시계를.
스스로 타고 있는 생담배와 같은 시계, 문방구 집 마누라의
바람기와 같은 시계, 모음조화와 같은 시계, 차가운 달과 같은 시계
언젠가는 나를 죽일 시계를

오래전에 읽은 하일지의 < 내 꿈속의 시계 > 를 떠올리는 사이 강물은 흘러갔고, 햇살은 빗금의 각도를 기울이며 강물 위로 꽂히고 있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마을 어귀의 평상에 앉은 노인들을 만났다. 이 마을 이름이 왜 괴골이죠? 괴상할 괴(怪)자를 쓰는 것인가요?

"아뇨, 느티나무 괴(槐)랍니다."
글 < 길 위의 칸타빌레 > 저자
사진 김은주
영월 여행쪽지

싸리재에서 독특한 잠자리를

◎ 숙박 :

인터넷이 발달한 국내에서 강원도 영월 인근의 숙박업소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독특한 잠자리를 찾는 사람이라면 태백과 고한 사이에 있는 싸리재 (해발1268미터, 국도가 지나는 가장 높은 고개. 두문동재 라고도 한다)를 올라가 보길 바란다. 터널이 생기고 나선 오가는 차량이 드문 고갯마루엔 돌담불이 있는 언덕마당이 있다. 차 안에서 자든, 비박을 하든, 텐트를 치고 자든 전국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음식: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로 쇠고기를 입에 대기가 불안해하는 분이라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섶다리마을 다하누촌 을 한번 찾아가 보시길. 이름 그대로 100% 한우를 사용한다고 해서 지어진 다하누촌에서 마음 편히 저렴한 가격에 한우를 맛볼 수 있다.

◎ 둘러볼 만한 곳:

한반도 지형 선암마을

은 사진가들이 자주 찾는 장소. 목재로 바닥을 단장한 지점에 도착해서 한반도 지형 같지도 않은데! 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포토포인트는 걸어오던 길에서 반대편으로 20미터를 내려가야 있다. 청령포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곳으로 슬픈 역사를 걷어내고 바라보면 풍광 좋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섬 아닌 섬이다. 삼면은 물이고, 한 면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지형. 그 속엔 울창한 거송들이 꿈틀대며 하늘로 하늘로 머리를 세운다. 김삿갓계곡은 이문열 소설 < 시인 > 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방랑시인 김병연의 묘가 있는 곳으로 방랑·술·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한번쯤 찾아가 보아야 할 장소이다. 청주든 탁주든 한 병 준비하고서. 가까이에 4억년 전부터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고씨동굴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