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越 이야기

흥교

浮石 2008. 12. 21. 19:22

 

 

 

 

 

 

 

 

 

 

 

 

흥교

흥월리 마지막 동네이며 경치가 장관을 이루어 등산로의 마지막 코스이며 여기서부터 등산을 시작하는 사람도 많다.

달골에서 휜깃재(홍교재)를 넘어 흥교분교가 있는 동네로, 학교터에 신라시대의 대사찰인 '흥교사(興敎寺)'가 있었으므로 '흥교'라 하였다.

이곳은 남면 조전리, 충북 하원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웃인 장승개의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에는 교통의 중심지로 한 때는 50여 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서너덧 가구가 살고 있다.

 

흥교에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흥교사는 아홉 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었고 공양미를 씻을 때는 뿌연 쌀뜨물이 영춘의 군관 모랭이까지 흘러갈 정도로 큰 절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들의 부패가 심해져, 돈 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팔러오면 돈과 물건을 빼앗은 뒤 마을 뒤에 있는 사굿구덩이에 처박아 죽였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곳 흥교사는 빈대가 많이꼬여서 결국은 절에다가 불을 질렀는데 절집이 보름간을 탔다는 얘기가 전하고 있으며 얼마전 객토를 위해 땅을 팔 때 절터에 타다 남은 기둥과 숯이 나왔었다.

그 절터인 흥교분교 운동장에서 1984년 높이가 6.5cm, 둘레가 2.5cm인 석가여래입상이 발굴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보관하고 있다. 또한 흥교사의 규모가 크고 화려했음을 알 수 잇는 것은 이곳 절터에서 영월 지방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개와(蓋瓦)가 발견되었는데, 불교의 상징인 연꽃 무늬가 새겨진 수막새와 귀면와(鬼面瓦), 그리고 용 두 마리가 좌우에 서로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고 테두리에는 구슬띠무늬(蓮侏文)가 그려진 암막새(암키와 끝에 드림새를 붙이는 개와)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부도나 고려 청자 파편, 석탑조각들이 그 흔적을 남긴 채 널려있다.

 

영월의 흥교사(興敎寺)를 신라 때는 세달사(世達寺)라 했는데, 후고구려를 세운 신라 47대 헌안왕의 아들인 궁예(弓裔)가 이곳에서 중이 되었다고 「삼국사기열전(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弓裔 便去世達寺 之興敎寺是也 祝髮爲僧自號善宗, 궁예는 세달사로 갔으니, 지금의 흥교사가 있는 곳이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되어 스스로 이름을 선종이라 하였다.』

또한 흥교사가 세달사임을 밝혀주는 내용이 삼국유사 卷三에 있다.

『昔新羅爲京帥時 有世達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奈 李郡 按地理志 溟州無奈李郡唯有柰城郡 本奈生郡 今寧越,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지금의 흥교사)의 莊舍(농장)가 명주 내리군에 있었다. 지리에 의하면 명주에 내리군은 없고 다만 내성군이 있었는데 본래는 내성군으로 지금의 영월이다.』

그후, 궁예는 환속하여 892년에 원주의 도적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어 치악산의 석남사(石南寺)를 중심으로 진(陳)을 치고 내성(奈城, 영월), 주천(酒泉), 울오(鬱烏, 평창), 어진(御珍, 진부)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주천에 있는 법흥산성, 도원산성 그리고 북면의 공기산성이 그 당시에 쌓았던 성(城)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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