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칠장사(七長寺)

浮石 2010. 4. 27. 12:29

 

칠장사 범종각과 누각

 

사천왕문

사천왕문 안에는 지국천왕,광목천왕,증장천왕,다문천왕의 조상()이 양쪽으로 모셔져있다. 

범종각

범종은 교체 작업중으로 인간문화재 제112호인 원광식씨의 작품으로 범종의 무게가 1,500관이라고한다.

 

목어

목어(木漁)는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구(佛具)의 하나로서 어고(魚鼓)·어판(魚板)이라고도 한다. 나무를 길게 뻗은 물고기 형체로 다듬은 다음, 배 부분을  비게 끔 파내어 물고기의 양쪽 배를 나무 막대기로 두들겨 소리를 낸다. 이는 물 속에 사는 모근 생명체를 고통에서 끌어 낸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사찰 식당이나 창고에 걸어 두고 사람들을 불러모을 때 사용했다. 그러다가 점차 불경을 읽거나 새벽에 예를 드릴 시간에 그 신호로 목어를 치게 됐으며, 천지 만물을 일깨우는 불교사물(佛敎四物, 범종 · 법고 · 목어 · 운판)의 하나가 됐다.

 

범종이 있던 자리..  종소리를 종 아래에 있는 이 홈에서  한군데에  모아서 울리게하는 용도인 거 같다

 

샘 물이 말라서인지,  여기 저기 공사 때문인지 절 전체가 어수선하고 삭막해 보였다..  절간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웅전 앞의 연등..     

연등속의 죽림리 삼층석탑

 

죽림리 삼층석탑

이 탑은 전체 높이가 363cm이고, 지대석은 가로 171cm, 세로 140cm이다.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석탑으로, 중대석은 각 면을 1식으로 마감하고, 갑석은 1판석에 옥신괴임을 2단으로 둥글게 처리하였다. 1층 탑신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면에 둥근 고리(문비)를 탑몸돌[옥신 : 屋身]에는 양쪽에 모서리기둥 [우주 : 隅柱]을 조각하였다. 2층이상의 탑신은 1층에 비해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 심한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다. 2층과 3층 탑신석은 1층과 같이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모두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옥개석 받침은 각 층 4단을 이룬다. 상륜부는 방형 노반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의 체감비율이나 옥개받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원래 죽산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몇 개의 부재를 모아서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석불입상  보물 제983호

대웅전 옆에 조성되어 있는 석불입상으로 원래 죽산산성 아래 관음당이라는 마을에 있던것을 훼손이 심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아마도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였던 봉업사지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강암 1매로 대좌없이 광배와 함께 조성되었습니다. 불상 높이는 157cm, 어깨 너비가 50cm, 광배의 높이는 195cm입니다. 민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있고 이목구비는 마멸이 심해 전체적인 인상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둥그랗고 도톰한 얼굴은 양 볼이나 턱에 부피감이 보이는 등 대체로 원만한 상호(相好)입니다. 양쪽 귀는 길게 표현되어 어깨에 닿을 듯한데 목의 삼도(三道)와 잘 어울려 위엄이 보입니다. 불의(佛衣)는 통견으로 배 부근까지 여러 겹의 둥근 선을 그리면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또 그 아래 무릎 밑에는 군의도 보입니다. 이 군의는 두 다리 사이에서 지그재그 모양의 옷주름이 조식되어 있습니다. 왼 손은 자연스럽게 옷자락을 잡고 오른손은 가슴부근까지 들어서 가슴에 대고 있습니다. 광배는 거신광(擧身光)으로 그 둘레를 불꽃무늬로 두르고 두광과 신광의 바탕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습니다. 원형 두광에는 여러가지 수인을 취한 화불(化佛) 3구가 돋을새김 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통일신라 시대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고려시대 초기에 유행하던 지방 양식의 특징도 보이기도 합니다.

대웅전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말사이다. 창건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10세기 경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1014년(현종 5)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건했다는 설이 있다. 사찰의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고려시대 1383년(우왕 9)에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역대실록을 이곳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389년(공양왕 1)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된 것을 조선시대 1506년(중종 1)에 흥정이 중건했다. 1623(인종 1)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크게 중창했다.

1674년(현종 15) 권력자들이 장지로 쓰기 위하여 사찰을 불태웠으나 초견이 다시 중건했고, 1694년(숙종 20)에 다시 불에 탔으나 1704(숙종 30)에 석규가 대법당과 태청루 등을 지었으며, 1725년(영조 1)에 선진이 원통전을 세웠다. 1726년(영조 2), 1751년(영조 27)에도 약간 이축·증축했고 1877(고종 14)과 이듬해에 중건했다.

대웅전, 사천왕문, 원통문, 명부전, 나한전 등을 비롯하여 12동의 건물이 있으며, 혜소국사탑, 탑비, 철제당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혜소국사는 속성은 이씨이며 이름은 정현인데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여 10세 때 광교사 총회에게서 구법하고 17세에 영통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8세에 왕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칠현산에서 아란탑(阿蘭塔)을 세워 홍제관이라 하고 좌선하였다. 1054년 83세로 입적했다.

 

 대웅전 처마끝의 풍경..

혜소국사비 보물 제488호
 

흑대리석으로 만든 비몸돌  보물 제488호

 

비몸돌의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다.   

문종 14년(1060)에 세워진 이 비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비받침인 귀부(龜趺)  

비머릿돌   보물 제488호
 

산신각 

 

부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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