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잡은 날 / 유승도

浮石 2010. 11. 4. 15:59

 

 

 

 

 

돼지 잡은 날

 

                                          유 승 도

 

 고기를 씹으면 피비린내가 뇌로 퍼진다 내가 내려친 도

끼머리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돼지, 칼로 멱을 찌르니

콸콸 쏟아지는 피, 그 피가 내 머리뼈 밖으로 흘러내린다

 푸푸 머리와 몸통 사이, 끊어진 기도를 통해 세상을 향

해 토해내는 돼지의 거친 숨이 내 가슴으로 들어와 코로

입으로 뿜어져도 나는 고기를 씹는 입질만은 멈추지 않는

다 쓰러지며 내지르던 소리 없는 날카로운 소리가 내 멱도

따겠다고 덤벼들어도 나는 입질을 멈출 생각이 없다

 나를 바라보던 째진 눈의 어두운 눈빛이 눈앞을 가릴수

록 나는 고기를 씹는 일에 더욱 힘을 준다 피가 멈춘 뒤에

도 더 살겠다며 퍼덕이던 다리와 출렁이던 엉덩잇살의 움

직임이 사그라질 무렵 한 줄기 내놓던 오줌 줄기가 내 생

식기 주위에서 어른거리며 고기를 뱉으라 해도 나는 씹는

다 간과 허파와 지라와 심장 그리고 두 눈 부릅뜬 채로 삶

아진 머릿살까지 우적우적 씹는다 네 발을 자르고 여섯

토막 낸 돼지의 몸뚱어리를 햇살이 아무리 밝게 비추고

있어도

 돼지를 잡아 고기를 먹는 날이면 술로 먼저 입을 헹궈

도 돼지의 피비린내가 온몸으로 파고든다 그럴수록 나는

돼지고기를 씹는다 꾹꾹 씹어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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