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율리서원( 栗里書院)

浮石 2014. 5. 27. 07:00

 

율리서원( 栗里書院) : 고령군 덕곡면 가륜리(양지가) 소재  

 

승암공(勝巖公) 李仁任 先生 묘소앞에 위치한 율리서원은 안산서원 매운당과 함께 많은 인재를 배출한 영남학파 인맥의 산실이다.

승암재(勝巖齋)

 

승암공(勝巖公) 이인임(李仁任)

 

본관은 성주(星州). 할아버지는 성산군(星山君) 조년(兆年)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포(褒)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후기의 향리(鄕吏) 출신으로 성주 지방에서 대대로 호장직(戶長職)을 이어오다가 중앙에 진출한 신진세력이다.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이 된 후 전법총랑을 거쳐 1358년 좌부승선이 되었다.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해 의주를 함락하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서경을 방비했으며, 1361년에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은 복주로 피난가고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개경 수복전에 참여했다. 1363년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충선왕의 셋째 아들)을 고려 왕으로 삼아 고려에 들이려 할 때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이 되어 식량조달을 맡았으며, 당시 압록강을 건너 공격하려던 공민왕에게 그 불리함을 설득해 압록강을 고수하게 한 공으로 1365년 삼사우사가 되었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 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신돈(辛旽)이 정치표면에 나타나 개혁조치로 추진했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에서 그는 주무(主務)를 맡아보는 등 신돈의 여당(與黨)으로 정치실무를 장악했다. 1371년 공민왕이 신돈을 숙청하고 모니노(牟尼奴: 뒤의 우왕)를 명덕태후(明德太后)에게 들일 때에도 다시 등장한 보수성향의 무신세력과 제휴하여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져나갔다.

1374년 공민왕이 죽음을 당하자 도당에서 후사를 논의할 때, 우왕이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어린 우왕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그는 이전의 외교정책과는 달리 원·명나라에 두 다리를 걸치는 양단외교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는 당시 집권세력이 보수적·친원적 성향을 띤 권문세족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지만 보다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친명정책을 추구했던 공민왕의 피살사건과 뒤이어 일어난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의 살해사건 때문이었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전환은 신진세력의 맹렬한 비난과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은 연일 정부의 친원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이첨(李詹)은 이인임의 목을 벨 것을 상소했다. 이에 최영(崔瑩)·지윤(池奫) 등과 함께 반대하는 신진세력을 거의 다 몰아냈다. 1382년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을 느껴 임견미(林堅味)에 의해 한양 천도가 추진된 이후 정치적 실권이 약해졌다.

 

1386년 다시 좌시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했다. 염흥방(廉興邦)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믿고 자신의 토지를 빼앗자 이에 격분한 전직 밀직부사 조반(趙胖)이 이광을 죽이자 염흥방은 조반을 국가모반죄로 몰아 옥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1388년 우왕은 최영·이성계(李成桂)와 의논하여 오히려 염흥방·임견미·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다. 이때 그도 경산부에 안치(安置)되었다가 곧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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