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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성구씨가문(綾城具氏家門)시랑공파

浮石 2015. 2. 10. 07:00

 

 

화순군 한천면에 있는 능성구씨 시조묘

 

화순군 한천면 능성 구씨 가문번성과 후손

 

7세손 이후 가문번창 후손들 忠烈정신 계승
화순군 한천면 정리(정동마을)는 북쪽으로 매봉산(188.8m)을 뒷산으로 하는데  이곳에 구민첨의 묘가 있다.

동쪽으로 두루봉(노적봉)이 있으며 큰고랑과 작수굴, 개먹굴이 있으며 서쪽으로  홈거리와 장구배미가 있고 그 너머로 안산과 연주산이 있다.

서북쪽으로는 정동제 저수지가 있으며 그 위로는 민재가 있는데 능주면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재를 넘으면 모산리가 자리한다.

마을로 들어서는 골짜기 입구에는 구희를 모신 충효문이 있고 마을 입구에는  능성구씨 시조를 모신 영모재와 구존유초혼장지 및 거목이 수그루 심어져 있어  이곳이 구씨 집성촌임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시대 때 나씨와 신씨가 현재 나신밑에라고 부르는 집터에서 거주하다가  모두 다른 곳으로 이거했고 후에 다시 창녕조씨가 살다가 이거했다고 전한다.

1570년께 능성구씨 선(善·1550∼1615)이 현 춘양 용곡 통안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했다는 것이 중론인데 앞서 언급했듯 이곳 집성촌 역사는 300여년 안팎이라는  것으로 후손들은 추정하고 있다.

화순군 한천면 일대에 터를 잡은 능성구씨 가문이 번성한 것은  시랑중파 영량(英良)의 7세손 환(桓)이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낸 이후부터다.

그는 도량이 넓고 준직(峻直)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후 1392년(태조 원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이태조(李太祖)가  누차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불응하고 능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며 절의를 지켰다.

그의 7세손 두남(斗南)은 부사정(副司正) 정(綎)의 아들로 중종 때 효행이 뛰어나  공릉참봉(恭陵參奉)에 특제(特除)되어 경릉 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명종 때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이르렀다.

두남의 손자 희(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휘하로  들어가 금산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진주성(晋州城) 수비에 가담, 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충효의 전통을 지켰다.

정리(政里)의 지명은 정승굴(政丞洞) 마을의 지명에서 정(政)자를 취하여  정리라 명명되었으며 현재 정동마을(1리)과 결우마을(2리)로 나뉘어 있다.

정동마을은 고려 때 능성구씨 구민첨이 평장사를 지냈는데 그의 묘가 이곳에 봉안된  이후 그의 관명을 따라 정승굴이라 하였다가 후에 정승굴이 정동(政洞)으로  간략화된 것이다.

정리에 자리한 구민첨의 묘는 호남 8대 명당 중의 하나인 천녀등공혈에 속하는데  경사 70%로 아주 가파른 곳이라 축대를 쌓으면 허물어지고 다시 쌓으면 허물어져  방책을 생각하던 중 지나가던 스님을 붙잡아 그축대에 생매장하고 축대를 성축한  결과 지금까지 허물어지지 않는다고 전한다.

또 정동마을 뒷산 일대는 인조반정후 1632년 인헌왕후와 관계하여 능성구씨의  사패지로 하사됐고 능성구씨 시조선산에는 사수문장석상, 맹호석상, 삼각형  홍살문이 있다. 마을 정면에 도대문이 있고 뒷산에는 승지샘이 있다.

도대문은 1929년 1월 28일 마을의 대문으로 도둑을 방지하기 위하여 새로  만들었는데 이전에 달았던 도대문은 떼어다 마을에 두었다.

후손들 중 가문을 빛낸 주요 인물로는 구본순(具本淳 1842∼1913, 통정대부, 좌승지, 참판, 내무찬신가선국장), 구원모(具源謨 1877∼?, 옥과군수), 구교주 (具敎胄 1877∼?, 목포군부주사), 구철우(具哲祐 1904∼1989, 서예가, 국전심사위원장), 구만우(具萬祐 1906∼?, 한천면장), 구원우(具元祐, 1909∼ ?, 한천면장) 등이 꼽힌다.

이처럼 고려(高麗) 후반기에 문호(門戶)를 연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조선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무맥(武脈)을 이어오면서 권력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시조 존유(存裕)의 7세손 때부터 가세가  크게 번창해 충렬의 미덕을 계승하며 귀감이 되고 있다. 

 

능성구씨가문(綾城具氏家門)의)시랑공파는  고대국가의(가야국,신라국)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

 

 

가야국(金官國:加耶國)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仇衡王](재위 521∼532)과 증손자 ,김유신(金武力 . 仇武力)의 가야와 신라합병  (백제에는 仇台王, 구수왕, 근구수왕)

 

--->통일신라건국에 크게 기여했으며(구진천(仇珍川),구 기(仇 杞),구 근(仇 近),구 진(仇 珍), 김유신(金武力 .仇武)등 많은 장수들)

 

--->고려개국공신이며 고려건국 크게 기여했다. (구존유.구진등 많은 구씨(具氏)의 장수) (왕건의 5대조모,구치의(仇置義 , 具置義) 

 

--->조선의 개국 공신이며 정신적토대 성리학(고려 망명. 주잠의 가문과 혼인관계)

 

---> 2014년현재  한국의 세계10위 경제대국을 이루는 데 크게 기여 하고 있다.(LG그릅)

 

 

 

 

 

 능성구씨가문(綾城具氏家門)시랑공파의 역사및 인구 증가의 비밀

 

 

통일신라에 장보고의 휘하에 있던 왕건과 그의 조상은 완도(청해진),내륙의 통로인 영상강의 나주, 그리고  예성강의 개성을 중심으로 중국과 해상무역을 했으며. 장보고및 왕건(고려.태조)의 해상무역의 중요거점의 나주에는 구씨(氏)성을 가진 토호세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주와 해상무역으로 예성강의 주변지역으로 이주 했을 것으로 예측하며.. 예성강(개성)즉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의 부자집 딸인 왕건의 5대조모.구치의(仇置義 具置義)가 대표적이다. 왕건의 가문과 가까웠을 것으로 판단이 되는 구치의  친정(仇置義 具置義)(本家)의 가문과 가까운 일가(一家)후손구존유(具存裕.918년).구진(仇鎭.918년)으로 판단이 되며 왕건과 함께 태봉국(궁예 901년)의 건국공신이며 다시 고려(왕건(王建.918년)의 개국 공신이 되었다.

 

시랑공파는 능성구씨가문(綾城具氏家門)의 두번째로 큰 집안으로..삼국시대에 백제나 신라의 귀족및  가야왕족으로 구씨()성을 사용하다가 태봉(궁예)에서 고려(왕건)개국에 공을 세운  구진(仇鎭)이 고려 태조(왕건)으로 부터 구씨(具氏)을 하사(사성(賜姓) 받게 되면서 구진(仇鎭)-->구진(具鎭)으로  바뀐다. 또한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성남해상의 중요한 전략지인 나주에 "도대행대시중(羅州道大行臺侍中,서기918년)"에 임명되면서 나주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려개국공신. 충열공 능성인 구존유[(具存裕.918년).신흥사(新興寺.태조23년)17번째벽화,벽상공신]는 구진의 아들(장남 또는 형제) 가능성이 있으며.. 이들의 후손들이  개성및 능주에 정착을 하면서 능주지역의 토성 성씨(구씨,具氏)로 현재까지 거주하고 있다.

 

영상강의 나주(영산포)는 백제--> 통일신라--> 고려를 거치면서  고려(개성)및 중국(中國)과의  중요한 해상무역의 내륙항구로써, 1224년(고려.고종11년)에  남송나라에서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이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를 받자. 중국 신안에서 주희 증손자.주잠(朱潛)과 그의 일행이  나주의 영산포로 망명을 하였다. 그리고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토호세력.구진(具鎭)의 후손. 즉 구씨(具氏)성을 가진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금의 조상은 지금으로부터 300년전(약1680년)  전남 완도군 금일도 월송리(청산도--> 덕우도-->금일도)에 홀로 서당 훈장 선생으로 갔다가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당시 시대사항은 숙종으로 소론과 노론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매우 불안한 시기로 금일도로 피난(귀향)갔다는 설이 있고.  능주는 지리적으로 전답이 많지 않아서 금일도에 선생으로 갔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리고 당연이  육지와 교류없이  고립되어 살아왔고.  육지의 시랑공파는 자손이 끊겼다.   지금의 사랑공파는  금일도 월송리 후손이며.   6.25 전쟁이 끝나고 구희두당숙의  아버지 구갑득종친의 노력으로 족보가 편집되었으며.("가승보")  시랑공파 대 종손이 없어 화순군 추양면  집성촌을 찿아가서  종손으로 추정되는 집을 추천받아 시랑파 대종손으로 올렸다. ( 그 당시 족보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한다. 일가중에서 비용문재로 등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시랑공파 인구는  불과  80년전  40여의 집안에서  폭발적으로 증가 .현재는 205명의 집안으로 증가 했다.(오래전에는 월송리에는 35가구가 있었다 한다.) 

70년전 일제의 토지수탈로 전라도 인구의 타지방으로 이동과 징병 그리고  6.25를 거치면서 국군의 빨갱이 토벌로 엄청난 전라도민의 학살및 북한군의 양민학살이 있었다.그리고 여순반란사건으로 전라도민 1만명이 살해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전라남도 인구의 증가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인구증가율이 작다.  전라남도 시랑공파는 80년전에 비해 인구 증가율은  5배 증가 했다.

 

과거 족보가  너무 비싸 소유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증조부가  보성군 참봉를 지냈던 관계로 족보를 유일하게 보유하면서. 할아버지와  (전)고등학교장.구희두종친 아버님 구갑득께서 흩어져 살고 있는 종친들을 만나가며.. 수 작업으로 편집하였다 한다.

구씨전체로 본다면 4개파가 90%(도원수파40%),  5개파 1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각 파의 인구 비율 또한 비 현실성이 크다.

 

과거 양반은 관직를 오르면 고향를 떠나 타지방으로 이동한다.  다시말해 자손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타 지역에서 만난기생은 임신 또한 어려워  자손 번창은 불가능하다.  과거 삼한시대의 수많은 성씨가 자손이 없어 사라졌고 조선시대에 기록된  수백개의 성씨의 본이 사라졌다. 16세기(서기1600년)이전에는 양자로 하여금 대를 있는 문화가 없었으며 유아 사망율이 매우 높아 단절하는 가문이 매우 많았다.

 

2300년의 역사를 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기씨는 만명 정도이고. 은씨나 마씨등 2500년의 역사를 가진 성씨는 불과 인구가 몇 천 명이다.

1500년전 가야왕국(加耶王國)에 뿌리를 둔 김유신의 후손 김해김씨가 300만명이라고 한다.  만약 그 당시 남자 인구가 50만명이라고 한다면 각각의 성씨는  50만개이며 그 당시 남자의 전체인구가  현재까지 50배정도 증가 했다고 가정하면  각 성씨당 남자 인구는 50명 이어야 한다.

 

참고사항:능성구씨는 동사보유(東史補遺)'와 '주청계공실기(朱淸溪公實記)'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구씨(具氏)는 송(宋)나라 출신인 구존유(具存裕)가 고종 11년(1224년) 신안 주씨(新安朱氏)의 시조(始祖) 청계(淸溪) 주잠(朱潛)과 함께 고려(高麗)의 금성(錦城ㆍ지금의 나주)에 귀화(歸化)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인구는 2000년에 총 37,706가구 120,503명으로 333성씨중에서 73위로 나타났다

 

 

[※ 참고사항: 금성 범씨의 시조 범승조(范承祖)는 중국 낭야(瑯琊) 사람으로 원나라에서 예부시랑을 지내다가 고려 원종 15년(1274년)에 충렬왕 비인 제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한국에 들어와 진해진(鎭海鎭, 현재의 나주)에 정착하였다.

인구는 2000년 기준 3,316명이다.

[※ 참고사항:증조부가  보성군 참봉의 관직으로 족보를 유일하게 보유하게 되고 구갑득종친의 유능한 지식인이 있어 금일도 후손은 족보에 등재가 되었지만  그  밖의 전라도 시랑공파의 후손은 연고가 없어 등재가 어려울 수 있으며..그 지역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구가(具家)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일재시대(1909년 호적법)에 이름없는 평민이나 천민이 구(具)로 개명했을 경우도 많고..아니면 본래의 구가(具家)인지는  친 조상의 윗대.. 최소 6대조의 조상과 묘가  있느냐  없느냐로 판별를 할 수 있겠다.

 

성씨 인원 계산을 해보자

자손남녀 3명를 두었다고 가정하고. 남자가1.5명(그리고 모두가 성장하고 자손를 둔다는..가정하고)

1.세대당(30년)기준.. 병마로20%사망, 전쟁으로 1%사망 (고려초까지) 2.그 이후 병마로 20%사망 ,전쟁으로 05% 사망(현재까지)

1.15×1.15×(27대)×1.20×1.20×1.20×(23대)×3(베이붐세대,51대)=10,257명(51대),(총 51대.로 계산하면..김해김씨)

 

2.능성구씨를 가정하면 (세대당 병마및 전쟁 으로. 약 17% 감소.. 가정하고)

1.3×1.3×1.3×(28대)×3(베이붐세대,29대)=4,651명÷9 파= 516명

결론을 말하면 29 기준. 총인구 4,651명(남,녀)에. 각 파당.. (남,녀)516명이 나온다.

 

 

과거  가문의 인물은...!

 

구치의(仇置義 具置義):왕건(고려태조)의 5대조모.. 예성강(개성)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

구진(具鎭):서기 918년에 나주대행대시중(羅州大行臺侍中)을 지냈으며, 고려태조(왕건)으로부터 구씨(具氏)를 하사(사성(賜姓)받게 되면서 구진(仇鎭) - 구진(具鎭)으로 바낀다. 그리고 나주 및 능주에 정착하였다.

 

구존유(具存裕 918년)충령공:능성구씨본시조, 고려개국공신, 백상공신(정1품),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을 지냈다.

구영랑(具英)시랑공파중시조:고려초기 정3품의 시랑을지냈다.

구환(具桓):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시랑을 지냈고, 조선 개국 후에는 태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능주로 돌아가 절의를 지켰다.

구방경(方慶):조선시대에 현령을 지냈다.

구두남

(具斗南): 1528(중종 23) 진사시에 합격한 뒤 공릉참봉(恭陵參奉경릉참봉(景陵參奉)을 거쳐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 지냈다.

구희

(具憙):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금산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에서 왜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구제동(具濟東)는 1883년(고종20년)  진사시에 합격한 뒤 보성군(寶城郡).참봉(參奉)를 지냈다.

 

 

 

 

시랑공파및 그밖의 계파의 항렬 

 

 

 

918년 고려개국공신(940년( 태조23년)신흥사 벽화)구존유본시조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 구영량 파시조)   시랑공파  시작 -->      7대    
       8대    
1224년    (고려고종11년) 주잠과 같이 망명 (주
와 혼인관계)
   1대  9대    
     2대  10대    
     3대  11대    
     4대  12대    
     5대  13대    
     6대  14대    
     7대  15대    
     8대  16대    
     9대  17대    
     10대  18대    
     11대  19대    
     12대  20대    
     13대  21대    
     14대  22대    
1575년(선조8년)에  『乙亥譜』 內外譜  구씨최초의 족보 간행    15대  23대    
     16대  24대  연  ①
     17대  25대  서  ②
     18대  26대  회  ③
     19대  27대  자  ④
     20대  28대  본  ⑤
     21대  29대  모  ⑥
     22대  30대  교  ⑦
     23대  31대  우  ⑧
1870년 전.후          항렬을 쓰기 시작한 시기   -->  연  24대  32대  제  
   서  25대  33대  림  
   회  26대  34대  회  
2014년             현재(각 계파의 "자.규" 중심 항렬)  자  27대  35대  규  
   본  28대  36대  종  
   모  29대  37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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