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대교 오거리
화천대교
화천고등학교와 화천체육관
북한강
고종 32년(1895) 전국을 23府 331郡으로 개편할 때, 낭천은 春川府 소속 13개郡의 하나가 되었다.
이듬해에 전국을 13道로
나누었을 때 낭천군은 江原道 소속이 되었다. 光武 6년(1902)에는 「華川」 으로 郡名을 바꾸었는데, 龍華山의 높고 아름다움을 본 받고자한
뜻이었다고 한다.
隆熙 2년(1908)에 양구군을 화천에 편입시켰다가 곧 분리하였다.
1914년에 看尺面과 東面이 병합되어 看東面으로 되고, 下西面과 南面이 병합되어 下南面이 되었다. 이즈음 화천군의 面里名은 다음과 같다.
郡內面 : 上里, 中里, 衛里, 下里, 新邑里, 豊山里, 大利里, 水上里,
水下里.(九)
看東面 : 東村里, 梧陰里, 太山里, 芳川里, 楡村里, 看尺里.
(七)
上西面 : 新豊里, 九雲里, 邑浦里, 蘆洞里, 山陽里, 馬峴里, 峰吾里, 多木里.
(八)
下南面 : 論味里, 原川里, 啓星里, 位羅里, 鋤吾芝里, 龍岩里, 居禮里. (七)
한말 의병사에 있어서도 화천지역은 기억될 만한 곳이었다. 198년(乙未年) 閔妃가 弑害되고 斷髮令이 공포되자 전국의 儒生들은 원수인 왜적을
토벌하고 大義를 세우기 위해 궐기하였는데, 이를 을미의병이라 부른다. 그중에서도 湖左(提川)義陳은 가장 격렬히 싸워 그 활동이
두드러졌다.
처음 경기도 砥平에서 起兵한 이들은 제천·단양 및 원주·영월 지방을 무력으로 접수한 뒤, 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義陳을 확대· 개편한 이들은 드디어 忠州城까지 점거하였으나 일본군 및 관군의 반격에 쫓겨 다시 제천까지 물러났다. 1986년 제천성도 함락됨에 따라 호좌의진은 西北大行軍을 결심하고, 강원도 남부를 거쳐 北上하던중 7월 22일(음력 6.12)에 召討將 徐相說(烈)이 낭천 관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이후 이들은 평안도를 거쳐 권토중래할 것을 기약하며 국경을 넘어 요동지방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