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은둔 선비의 삶 터를 보여주는 곡운구곡(谷雲九谷)은 바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김수증의 자취가 서린 곳으로, 강원도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었다.
김수증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이다. 김상헌의 손자인 그는 1650년(효종 1)에 생원이 되고, 형조ㆍ공조의 정랑을 거쳐 각 사(司)의 정(正)을 지냈다. 1670년에 김수증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복거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1675년(숙종 1) 그가 성천부사로 있을 때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성천부사를 사임하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그때 주자의 무이구곡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이라 하고, 곡운구곡을 조성한 다음, 1682년에 화가 조세걸에게 부탁하여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였다. 우리나라 구곡도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그려진 이 구곡도는 제작 동기와 연대 그리고 유래가 분명하게 밝혀진 작품이라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유물이다. 괴산의 화양구곡과 함께 화음동정사가 있던 이곳은 당시 선비들의 이상향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구곡 중 실경이 남아 있는 몇 곳 중의 하나이며, 중용의 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제1곡은 방화계다. 방화계는 춘천 쪽에 있는데(원래 춘천이었으나 1914년 지역통폐합 때 영평군으로 되었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 이 지역이 수복되면서 화천군에 편입됨), 봄에 강가에 피는 철쭉이 아름다운 곳이다.
제2곡은 청옥협이다. 맑은 물길이 길게 이어지는데(1곡과 2곡은 3.1킬로미터), 중간에 용담쉼터가 있어 쉬어갈 수 있다.
제3곡은 신녀협이다. 곡운이 평소 흠모하던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며,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호를 따서 지었다는 청은대가 있다.
하백의 딸 신녀가 머물 만한 골짜기라고 한다.
제4곡은 백운담이다. 안개와 구름이 머무는 아름다운 곳이다.
제5곡은 명옥뢰다.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여울이다.
제6곡은 와룡담으로 와룡이 숨었다는 깊은 물이다.
제7곡은 명월계다. 밝은 달이 비치는 계곡물이다.
제8곡은 용의연으로 의지를 기리는 깊은 물이다.
제9곡은 첩석대다. 층층이 쌓인 계곡의 바위가 멋진 곳이다.
곡마다 김수증의 아들, 조카, 외손 등 아홉 명이 매곡을 읊었다는 시비가 있다. 제1곡은 김수증, 제2곡은 아들 창국, 제3곡은 조카 창집, 제4곡은 조카 창협, 제5곡은 조카 창흡, 제6곡은 아들 창직, 제7곡은 조카 창업, 제8곡은 조카 창즙, 제9곡은 외손 홍유인이 지었다.
화음동정사는 곡운계곡의 7곡을 지나 다리를 건너 왼편 길로 들어가면 나온다. 삼일계곡이 있는 곳으로 김수증의 『화음동지』에 따르면 “동쪽으로는 방화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칠선동에 이르는 곳으로, 백운계(白雲溪) 위에 띠 지붕 정자를 짓고 요엄유라 이름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삼일정, 부지암, 송풍정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으며, 바위에 새긴 화음동, 태극도, 인문석, 하도낙서, 복희, 팔괘 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세계관을 조경에 나타낸 것이다.
김수증은 1694년 갑술옥사 뒤에 다시 기용되어 한성부좌윤ㆍ공조참판 등에 임명되나 모두 취임하지 않고 은둔하였다. 당시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곡운집』이 있다.
곡운구곡의 옛길은 계곡을 비켜가는 산자락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바로 계곡 옆에 길이 나면서 옛 정취가 많이 훼손되었다. 화음동정사 위편에는 신라시대 사찰 터에 세워진 법장사가 있다. 건축물이 지형에 어울리지는 않으나 화악산의 장엄한 위용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