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양서면 몽양길 66번지
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 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2011년 11월 27일 개관했다.
함양 여씨가 양평에 입향한 1715년(숙종 41년) 지어진 생가는 몽양 선생이 1886년 출생해서 부친 탈상을 끝낸 뒤 서울로 이사 간 1908년까지 사신 곳입니다. 6·25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2001년 양평 군민들의 노력으로 생가 터가 정비되고 이듬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것을 계기로 서거 64주년인 2011년 생가가 복원되었다.
생가 복원과 함께 건립된 기념관은 서거 당시 입고 계시던 혈의, 장례식에 사용된 만장, 서울 계동 집에 있던 책상, 2008년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의 유품과 자료를 전시하여 선생의 삶과 정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권총 테러로 피격당할 당시 입고 있던 옷으로 현재 몽양여운형기념관에 위탁보관 되어 있다. 여운형이란 인물이 갖는 역사적인 위치와 기증자(외손녀)와 기증일시 등 유물의 명세가 정확하다.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1918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여 당수로서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한편, 국내에 김철(金徹)·선우혁(鮮于爀) 등을 파견하여 3·1운동을 촉발시키고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과정에서 독립운동 정당 결성을 주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외무부 차장,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민단 단장으로 상해 거주 교포들의 권익 향상에 노력하였으며,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여 교포 자제의 교육에 힘썼다.
1919년 11월 일본 도쿄[東京]를 방문하여 고위 관료들을 상대로 한국독립을 역설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21년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결성에 참여하여 한·중 양국 민족의 공동 투쟁과 이해증진을 모색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대표 일원으로 참석하여 조선독립을 역설하였고, 독립을 실현할 목적으로 김구(金九)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호를 위해 개조론(改造論)을 개진하였으며,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 손기정(孫基禎)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본인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신문은 폐간되었다.
1940-1942년 5차례에 걸친 도쿄 방문을 통해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1944년 8월 비밀리에 건국동맹(建國同盟)을 조직하여 조국광복을 준비하였다. 28년에 걸친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2차례에 걸쳐 옥고(獄苦)를 치렀으머,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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