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녕전은 왕이 일상 거처하던 전각(殿閣)으로 사정전 뒤 향오문을 지나 침전구역의 중심을 이룬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 일각은 대침인 강녕전을 비롯하여 이를 보좌하는 4채의 소침으로 구성되는데 강녕전은 가장 중앙에 월대를 갖추고 좌우로 넓게 서 있는 건물이다.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고 하는데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라는 의미이다.
1395년(태조 4)에 창건되어 1553년(명종 8)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중건하고, 다시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궁궐지>에는 "55칸, 이익공, 기둥 높이 12척, 정면 가운데 3칸은 14척식, 좌우 협간 6칸 10척식, 동서퇴 7척식, 측면 가운데 3칸 10척식, 전후퇴 10척식"으로 규모를 나타내었다.
현재 강녕전은 정면 11칸,측면 5칸 규모로 초익공의 팔작 지붕이다. 높고 넓은 월대가 그 위상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다.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온돌방 사이의 문들은 미닫이 또는 분합문을 달아 방의 크기를 임의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녕전 전면과 후면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와 형태의 2개의 전과 2개의 당으로 구성되었다.
조선 후기의 전각. 왕비의 침전으로 궁궐 안의 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으며, 뒤뜰의 아미산 위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긴 굴뚝이 남아 있어, 왕비의 주택이 지녔던 높은 품격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17년에 불타 없어진 창덕궁 대조전을 짓는다는 구실 아래, 1920년 일본인들에 의해 헐려 대조전의 부재로 사용되었다.
원래 교태전이 있었던 자리에는 석탑·부도(浮圖) 등 민족항일기에 전국에서 강제로 옮겨다놓은 석물(石物)들이 배열되어 있다.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는 없었는데, 1443년(세종 25)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553년(명종 8)에 불탄 것을 이듬해에 중건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다시 불타버렸다.
이로부터 270여년이 지난 1865년(고종 2)에 중건되었으며, 1876년에 다시 불탄 것을 1888년에 재건하였고, 1920년에 창덕궁으로 옮겨질 때까지 건재하였다. 왕의 침전(寢殿)인 강녕전(康寧殿)에 대해 왕비의 침전으로 지었으므로, 궁궐 안에 있었던 150여 채의 건물 가운데 가장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뒤뜰에 있는 아미산(峨嵋山) 위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긴 굴뚝이 남아 있어(경복궁아미산의 굴뚝, 보물 제811호), 왕비의 주택이 지녔던 높은 품격의 일면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1890년대에 그려진 「북궐도형(北闕圖形)」과 같은 때 편찬된 「궁궐지」 등을 토대로 중건된 교태전의 규모 및 배치형식을 알 수 있고, 더구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는 1920년 당시의 사진과 평면도가 실려 있어서 원형을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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