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浮石 2016. 8. 1. 06:00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하다.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다고 전해지는 효명세자.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력과 맞서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염원을 채우지 못한 채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정사를 돌본 지 겨우 3년 3개월 만이었다. 효명세자는 후원에 작은 공부방인 의두합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를 즐겼다.


희정당(熙政堂:보물815호)


희정당()은 임금의 처소로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순조 때부터 국정을 논하던 편전으로 이용되었다. 선정전의 동쪽, 대조전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정전과 선정전이 동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라면 희정전과 대조전은 서쪽으로 치우친 남향이다. 이러한 좌향()의 변화는 이곳 지형의 생김새를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선정전과 희정당은 골목처럼 좁은 공간으로 연결되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공간이 넓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산군 2년(1496) 화재로 사라진 숭문당()을 중건한 다음 희정당()이라 칭하고 편전으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원년(1609)에 중건하였다. 그 뒤로도 인조반정으로 소실되어 인조 25년(1647)에 중건하였으며, 순조 33년(1833)에 큰 화재로 또 불타는 바람에 이듬해 재건한 바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17년 대화재로 내전의 모든 전각과 함께 소진된 것을 1918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가 1920년 중건한 것이다. 지붕의 동서 합각벽에 새겨진 길상문 ‘’(강)자와 ‘’(녕)자는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뚜렷한 흔적이다. 그렇다고 희정당이 강녕전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강녕전에는 없었던 용마루가 첨가되었고 강녕전 앞에 펼쳐져 있던 월대를 이곳에선 찾아볼 수 없으며, 건물의 구조 또한 변형되었다.


희정당은 본래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11칸 측면 5칸의 55칸 건물로 규모가 커지고 부분적인 변형이 이루어져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앞뒤의 중앙에 계단을 둔 5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선 건물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이익공 구조이다. 고주 위에 팔각형 주두를 올리고 그 위에 사각형의 재주두를 두어 대들보를 받치게 한 점이나, 사래 끝에 토수를 끼운 점 따위가 눈에 띈다.

지붕에는 양성마루를 올리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하였다. 내부는 건물 사면의 퇴칸을 통로로 만들어 중궁전인 대조전의 행각과 앞쪽의 여러 전각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때문에 실제 사용되는 공간은 정면 9칸에 측면 3칸이며, 그중에서 가운데 3칸이 응접실로 꾸며졌고 서쪽의 3칸은 회의실, 동쪽의 3칸은 창고이다. 앞면과 뒷면 중앙의 3칸은 아자 분합문을 달고 그 위로는 교창을 설치하였다.

응접실의 천장은 소란반자이지만 회의실은 서양식 반자로 되어 있다. 더불어 1920년대 중건 당시 내부를 서양풍으로 꾸미면서 서양식 가구와 커튼, 전등을 들여왔으며, 마루 위는 붉은 카펫을 깔아 처음 마주하게 되면 이색적인 모습이 낯설고 생경스럽다. 건물의 남행각 앞도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변형했는데 오얏무늬와 기둥의 낙양각 장식이 화려하다. 이곳에서는 순조 30년(1830) 5월에 효명세자(익종)가 승하했으며 고종이 경복궁 완공 전까지 머물기도 했다. 내부에는 1920년 순종의 명을 받아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남아 있다. 희정당은 보물 제815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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